3세기 용담동 철기부장묘, 수장층 권위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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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사 재조명 (2) 탐라도성, 역사 속 ‘탐라’
탐라도성의 설계 원리인 칠성도와 대촌의 존재를 보여주는 지도다.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동비여고’ 중 ‘제주도지도’(개인소장, 보물)
탐라도성의 설계 원리인 칠성도와 대촌의 존재를 보여주는 지도다.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동여비고’ 중 ‘제주도지도’(개인소장, 보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탐라를 건국한 삼신인은 우주를 의미하는 원형의 탐라도성(耽羅都城) 내 일곱 곳에 북두칠성 형태로 칠성도(대)를 세우고, 관부(官府) 부근에는 달을 의미하는 월대(月臺)를 분산 배치함으로써 전통 우주관을 땅 위에 구현했다.

▲북두칠성을 본떠 설계한 탐라도성

하늘의 신과 교섭하는 굿을 할 때 사용되는 무구(巫具)인 명두(明斗) 또는 울쒜에서도 천문을 상징하는 북두칠성 등의 별과 해와 달을 새겨넣은 것이 확인된다.

올쒜는 명두를 여러 가지 묶어놓은 것과 같은 형태로, 진성기 전 제주민속박물관장이 소정하고 있던 것이다.(제주대학교 박물관 소장)
올쒜는 명두를 여러 가지 묶어놓은 것과 같은 형태로, 진성기 전 제주민속박물관장이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제주대학교 박물관 소장)

제주에서 울쒜는 심방이 잡고 흔들면서 소리를 내 사용하는 무속 악기인 상징적 무구를 뜻한다. 해거울 1개, 달거울 1개, 몸거울 3개, 아왕쇠 1개, 뽀롱쇠 1개로 이뤄졌으며, 우주의 해나 달, 별들을 상징한다.

탐라지 제주목 ‘고적’조에는 ‘칠성도’와 ‘대촌’에 대한 내용이 기술돼 있다.(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소장)
탐라지 제주목 ‘고적’조에는 ‘칠성도’와 ‘대촌’에 대한 내용이 기술돼 있다.(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소장)

제주목사 이원진이 1653년 편찬한 탐라지의 제주목 ‘고적’조에는 ‘칠성도(七星圖)’와 ‘대촌(大村)’에 대한 내용이 기술돼 있다. ‘칠성도’는 ‘주성 내에 있다. 돌로 쌓았던 옛터가 남아있다. 삼성(三姓)이 처음 나와서 삼도(三徒)를 나누어 차지하고 북두칠성 모양을 본떠 대(臺)를 쌓고 나누어 살았으므로 이에 따라 칠성도라 불렀다’로 설명하고 있으며, ‘대촌’은 ‘삼도를 합하여 살아서 큰 마을이 되었는데, 곧 지금의 주성(州城)이다. 사람들이 주성 안을 대촌이라 한다’고 표현했다.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지도첩 ‘동여비고’에는 ‘제주도지도’가 수록돼 있다. ‘제주’라는 군현 이름 위에 옛 제주의 이름인 탐라(耽羅), 탁라(乇羅), 탐모라(耽毛羅), 동영주(東瀛州)가 병기돼 있다. 제주라는 군현 이름에 하얀 원형 띠 모양으로 표현했으며, 특히 제주성 옆에 ‘칠성도대촌 개재성내(七星圖大村 皆在城內)’라고 하며 칠성도와 대촌이 제주성 안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탐라국왕은 ‘성주(星主)’

‘성주(星主)’란 탐라국왕을 지칭하던 용어로, ‘성의 주인’이자 ‘별나라의 국주(國主)’를 의미한다. ‘고려사’ 태조 21년(938) ‘탐라국 태자 말로(末老)가 내조(來朝)하였기에 성주(星主)·왕자(王子) 벼슬을 주었다’라는 글에 처음 등장한다. 성주는 바다를 통한 주변국들과의 교류를 위해 별자리와 전문 항해술을 습득했던 탐라국의 수장이었던 것이다. 탐라는 탐라국왕을 성주(星主), 도성(都城)을 칠성도 대촌, 관청을 성주청이라고 했다.

1926년 칠성단의 모습을 담은 매일신보 5월 11일자 기사.
1926년 칠성단의 모습을 담은 매일신보 5월 11일자 기사.

칠성도 또는 칠성대는 탐라국시대에 탐라도성 내 일곱 곳에 북두칠성 형태로 세운 축대로, 고지도에는 칠성단이라 표기돼 있다. 칠성도(대)의 모습은 1926년 5월 11일 자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에 처음 등장한다. 해당 기사에서 순종 승하시 칠성단에 제주 사람들이 운집해 봉도식(奉悼式)이 치러졌다고 전하면서 칠성단은 나라에 중요한 일이나 큰 행사에서 의식을 집행하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강문규 전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은 ‘탐라국 칠성대, 그 가치와 의미’ 논고에서 “탐라국 초기에 축조된 칠성대가 어떻게 1500년을 훌쩍 넘는 길고 긴 세월 속에서도 온전히 전승될 수 있었는지는 놀라운 일이다”라며 “제주 선인들이 칠성대를 탐라의 상징물인 동시에 탐라인들의 정체성과 결속의 광장으로 활용해 왔음을 뜻한다”고 전했다.

▲역사에 기록된 ‘탐라’

‘탐라(耽羅)’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불렀던 제주의 옛 이름이다. 고대 탐라의 이름은 문헌에 따라 ‘삼국지’의 ‘주호(州胡)’ 이후 ‘주호국’, ‘섭라’, ‘모라’, ‘탐모라’, ‘탐부라’, ‘탐라’, ‘담라’, ‘탐라국’, ‘탁라’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졌다.

‘주호’에 대해 기록한 중국 역사서로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송나라 범엽이 기전체로 저술한 ‘후한서’와 1670년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4에서는 ‘탐라국’이 처음 등장하고, ‘탐모라’로도 서술하고 있으며, ‘고구려본기’7에서는 탐라를 ‘섭라’로 표기하고 있다.

제주목사 이원진이 펴낸 ‘탐라지’에서는 제주를 ‘탁라, 탐라, 탐모라, 동영주’ 등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 역사서 ‘삼국지’와 ‘후한서’에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주호‘라는 나라가 있으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중한(中韓)과 물건을 사고 판다’고 적혀있다. 이때 ‘주호’는 탐라 이전 이 지역에 존재했던 세력으로, 이미 앞선 시기에도 주변국들과 교역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을 지녔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문헌기록상 탐라의 등장은 5세기경부터 확인되지만, 고고 자료를 통해서는 이보다 이른 3세기를 전후해 거점 취락이 이뤄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용담동 철기부장묘, 신분·권위 상징

1985년 실시된 용담동 철제부장묘 발굴조사 슬라이드 필름.(제주대학교 박물관 소장)
1985년 실시된 용담동 철제부장묘 발굴조사 슬라이드 필름.(제주대학교 박물관 소장)

용담동 철기부장묘는 해안으로부터 약 1.5㎞ 떨어진 완만한 평지에 위치해 있다. 해당 유적은 제주국제공항 확장시설공사로 신사수동 마을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는 과정에서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제주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맡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양의 철제 무기와 장신구 등이 출토됐는데, 이는 철제가 생산되지 않았던 탐라의 영역 내에서 탐라 수장층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위신재(威信材)임을 입증한다.

용담동 철기부장묘에서 출토된 철제 장검. 지배층의 권위를 나타내는 위신재로 여겨지고 있다.(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용담동 철기부장묘에서 출토된 철제 장검. 지배층의 권위를 나타내는 위신재로 여겨지고 있다.(국립제주박물관 소장)

탐라는 3세기 무렵 앞선 철기시대와는 차별화된 거점 취락인 읍락이 형성되고, 원거리 교역을 통해 선진문물과 철 수입을 독과점한 정치적 상위집단인 수장층이 등장하는 등 탐라가 점차 단일화된 정치체인 소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경주 제주문화유산연구원 부원장은 논고에서 “기원전 1세기 이후 주호집단이 삼한과의 교섭을 통해 성장하는 3세기쯤 수장층이 출현하면서 대외 교류의 주체인 탐라가 등장한다”며 “이 무렵 축조된 용담동 철기부장묘의 피장자는 탐라와 한반도 남부지역에 위치한 여러 정치세력과의 교역체계에 참여했던 상위계층의 존재를 시사한다”고 전했다.

이어 김 부원장은 “탐라는 3세기 후반에서 4세기까지 변진한으로부터 공급받던 철을 수입하기 위해 김해지역에 성립된 금관가야와 교역루트를 개설했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철의 생산과 유통권이 재편되면서 5세기대 이후부터는 아라가야와 교섭을 진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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