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이겨낸 보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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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수 시인. 수필가. 아동문학가

차가운 땅속에서 긴 겨울의 모진 추위를 견디면서 푸른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음기가 천하를 뒤덮은 겨울일수록 과일 속의 씨앗처럼 엄청난 생명력의 양기를 응축시켜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보라가 뒤에 눈보라가 가면서 쌓인 눈밭이 된 겨울 보리밭, 소싯적 기억을 소환한다.

들녘에는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인 후 잘 삭혀진 돼지 거름을 보리 파종에 앞서 밭고랑에 띄엄띄엄 깔아놓았다. 가족의 주식인 보리 파종이 시작되었다. 인류의 문명과 함께 재배해온 보리, 문명이 발전하면서 재배법도 발전했고, 활용도에 따라서 품종도 다양해졌다.

제주에서 재배되어온 보리는 대부분 여섯 줄 보리다. 낱알이 촘촘하게 배열되어 있어서 수확량은 많은 편이다.

눈 내리는 어느 일요일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밖에 나와보니, 누가 모이자고 연락도 없었는데도, 동네 아이들이 마을에서 가장 넓고 넓은 문중의 한 가름밭에 모여들었다. 보리밭 밟기 축구시합이다. 편을 가르고 나서 골대는 돌담 두 덩어리를 내려놓고, 산두짚을 칡끈으로 얽히고 감아서 만든 공이 바로 축구공이다. 차고 뛰고 차고 뛰다보면, 칡끈이 신발끈 풀어지듯 풀어지면 다시 새롭게 산두짚을 이용해 공을 만들어 낸다. 발에 열기가 닳아오르고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공은 흙과의 싸움이며, 발은 땅을 힘차게 밟고 밝으며 서릿발로 들려진 땅을 다지고 다진다. 서릿발에 들뜬 보리의 뿌리가 깊게 내리게 하는 동력이 가동된 것이다. 꺾이고 상하기도 하지만, 참아내야 한다. 인내하지 않으면 보리는 튼튼하게 자랄 수 없다.

아등바등 몸서리치던 보리는 어느새 파릇 파릇 오동통하게 자라고 있다.

이제 눈구덩이 사이 사이 고개를 들고, 간들 간들 불어오는 바람에 싹이 뾰족이 얼굴을 내밀더니, 마침내 온 마을이 건강한 보리가 누렇게 익어 출렁이는 계절이 돌아왔다. 더없이 힘든 보릿고개를 넘는 순간이 아닌가.

지난해 거둔 양식들은 바닥나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제대로 먹지 못한 아이들의 입가에는 버짐이 하얗게 피던 시절이었다. 보릿고개를 넘는다는 말은 우리 앞에 ‘보리’라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가을에 씨앗을 뿌린 보리가 엄동설한을 견디며 알곡을 맺어 우리 가족의 살점이 되었으니 말이다.

제사상에 올렸던 ‘상웨떡’ 의 그 맛, 보리가 익어가는 은혜의 계절이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제 몫 하나 똑바로 못한다면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다며, 세상살이에 고난 없기를 바라지 말라. 고난이 없으면 교만과 자랑하는 마음만 일어난다며, 부모님으로부터 핀잔을 들은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고난 속에서 결실을 맺고 또 결실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일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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