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반란·역모 연루 많아…훗날 복권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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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정의현에 유배된 인물들(1)
제주유배 역사 시작은 고려시대, 702명 명단 확인
청주한씨 입도조 서재 한천, 정의현 최초의 유배인

▲제주유배의 역사


제주유배의 역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됐다. 제주를 맨 처음 유배의 섬으로 활용한 나라는 원이었다. 원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두면서 170여 명의 왕족·승려·죄수 등을 보냈다. 명나라는 투항한 몽고 왕족 등 약 200여 명을, 고려 조정에서도 10여 명을 유배 보냈다. 조선에서는 건국 전후 제주에 유배 보내기 시작해 후기에 와서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제주유배 수는 기존에는 200~300명으로 확인되다가, 2023년 ‘조선시대 정의현 유배인 연구’를 통해 제주목에 297명, 정의현에 122명, 대정현에 192명, 추자도에 91명으로 총 702명의 명단이 홍기표 박사(현 제주역사문화진흥원장)에 의해 밝혀지면서 제주유배 연구에 획기적인 진전이 이뤄진다. 정의현에 유배된 인물의 숫자를 왕대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태조(1), 성종(3), 연산(1), 광해(2), 인조(7), 효종(1), 현종(5), 숙종(11), 경종(5), 영조(75), 정조(8), 순조(1), 헌종(2).(괄호 안은 유배인 수)


▲정의현 유배인 신분과 유배 사유


정의현 유배인 중 가장 많은 수는 반란과 역모에 연좌된 가족과 친인척이었다. 정의현 유배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과 1755년(영조 31)의 ‘나주괘서사건’이었다. 


소론인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4명의 아들과 난을 지원했던 정희량의 가족들이 정의현과 대정현에 유배됐다. 이들은 2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나면서 정의현에서 처형됐다. 나주괘서사건은 소론인 윤지 일파가 ‘나주 객사’에 괘서를 붙이고 거사를 일으키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21명이, 영조 때만 모두 75명이 정의현에 유배됐다. 


정의현 최초의 유배인은 1392년(태조 1) 고려 부흥을 꾀하다 실패해 유배된 청주한씨 입도조인 한천(韓 )이며, 마지막 유배인은 1848년(헌종 14)에 세도가인 풍양 조씨와 맞서 순원왕후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된 이승헌(李承憲, 유배기간 1848~1850)이다. 중앙집권이 약화된 헌종 이후에는 유배인이 민란에 연루된 경우가 발생하면서 제주에서의 유배지는 제주목에 한정됐다.


▲정의현에 온 주요 유배인들

△청주한씨 입도조 한천(韓  ) 


고려말 판개성부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정2품)에 오른 한천은, 1392년 고려 부흥을 꾀하려다 실패한 후 제주에 유배돼 부인김씨와 두 아들과 함께 정의현(표선면 가시리)에 적거했다. 
한천은 유배 1년 후 복권이 되지만 돌아가지 않고 제주자연을 벗 삼아 제주에서 여생을 보내며 학당을 지어 제자들을 훈육하고,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입도조가 된다. 조선말인 1873년 제주도에 유배됐던 면암 최익현은, 두 임금을 모시지 않은 한천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을 높게 찬양한 비문인 「서재한공유허비(恕齋韓公遺墟碑)」를 남겼다. 

△방랑 시인 홍유손(洪裕孫)


향리의 역이 면제될 정도로 문장이 빼어난 홍유손(1431년~1529년)은 영남유림의 대부 김종직의 문인이며, 풍류객 김시습·남효온·김수운 등과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불리곤 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유자광의 미움을 받아 정의현에서 8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난다. 유배생활 동안 쓴 글들이 그의 저서 『소총유고(篠 遺稿)』에 담겨있다. 여기에는 정의현 관아의 대강을 알 수 있는 글인 「정의관사중신기(旌義官舍重新記)」가 있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관아의 동서 객사, 중대청과 좌우 부속건물, 중외 대문, 남쪽의 긴 행랑, 관아의 침실과 부속건물, 동서 양헌의 대청과 좌우 협실, 남쪽 행랑 약간 칸의 건물이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으로 준공되었다. (이하 생략)”  


이외에도 시 여럿 편과 존자암 중수를 권하는 「존자암개구유인문(尊者庵改構侑因文)」이 전해지고 있다. 


존자암은 서귀포시 하원동에 터가 남아있는데, 다음의 이유를 들어 존자암의 중수를 권하고 있다.


“제주도 정의현의 대족들이 악질에 많이 걸린 것도 존자암을 폐한 뒤부터이고, 흉년이 드는 것도 이 암자를 중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자암을 중수하는 일이 금법(禁法)에 저촉된다고 만류해도 막을 수가 없다” 


△강직한 인물인 홍무적(洪茂績) 


강직한 인물인 홍무적(1577년∼1656년)의 정의현 유배 시기는 1년(1646년~1647년)이다. 1615년(광해 7)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자는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이에 불가함을 상소한 홍무적은 거제도로 유배된다. 1628년 인조반정으로 해배된 홍무적은 고향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병자호란 때 백의종군한다. 


1646년 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 부인인 강빈(姜嬪)의 옥사사건이 일어나고, 왕의 음식에 독약 넣은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강빈이 사사된다. 


당시 대사헌이던 홍무적은 죽음을 무릅쓰고 강빈의 사사를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된다. 곧이어 소현세자의 세 아들인 석철·석린·석견도 제주도에 유배되면서 이들과 격리시키기 위해 조정에서는 홍무적을 정의현에서 남해로 다시 갑산으로 이배한다. 1649년(효종 원년) 홍무적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난다. 


이후 홍무적은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정헌대부에 오른다. 평소 홍무적은 임금을 섬길 때에는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자기가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자기가 말한 것은 반드시 실천했다고 한다.    


글·사진=강문석 (사)질토래비 전문위원·성읍별곡사진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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