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야(雪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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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기(시인)

온 섬이 꽁꽁 얼어붙었다.

눈이 푹 쌓인 내 서재 정류헌(情流軒)에서 이 글을 쓴다. 지난밤 눈싸라기가 창문가에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김광균의 ‘설야’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는 날 잠 못 이루는 시인의 그리움을 이보다 잘 표현한 시가 어디 있으랴.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이 시는 우리들 마음을 얼마나 설레게 했던가.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후략)’

지면 관계로 더 인용할 수 없어 아쉽다. 어느 구절이 우리를 설레게 했는지 모두 다 아실 것이다. 그 시절 검열이 매우 심한 때였는데 그래도 이 시는 국어 교과서에 그대로 실려 우리들 마음을 붙잡아 놓았었다. ‘여인의 옷 벗는 소리’는 어떤 소리였을까. 내가 국어 교사로 교단에 섰을 때는 이 시가 교과서에 나오지 않아 가르친 기억은 없다. 그러나 오늘처럼 눈 오는 밤이면 가슴 설레며 암송하는 시이니 나도 이런 시 한 편 쓰고 싶다.

창가에 내리던 싸라기가 함박눈으로 변한 모양이다. 그 고요함 속에 잠들고 아침 창문을 여니 모든 게 눈 속에 파묻힌 은세계였다. 눈 오면 좋아하는 건 아이와 강아지라 하지만 나도 동심으로 돌아가 환호를 지르고 말았다. 눈 속에 묻힌 자동차를 보면서 어떻게 나가지 하는 걱정에 제 나이로 돌아온 것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제부터는 ‘폭설(暴雪)’이었다. ‘暴’은 ‘지나치다. 난폭하다’라는 뜻의 한자인데 유독 날씨에 많이 쓰인다. 폭우 폭염 폭서 폭한 폭풍 등. 날씨에만 쓰였으면 오죽 좋으랴만 폭언을 일삼는 정치가들이나 폭행이 난무하는 밤거리는 생각하기도 싫다. 지나친 것은 날씨든 말과 행동이든 옳지 않은가 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생각하며 옛사람의 지혜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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