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황민화교육에 민족주의적 저항심 품다
일제 황민화교육에 민족주의적 저항심 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256)지식인 현응호

현용준, 제주대학교 교수 역임…제주 신화·무속 연구
현월, 재일교포 2세 출신 문학가…아쿠타가와상 수상
현유순, 정의항교의 훈장 역임…사림의 영수로 추앙
현응호, 광복 이후 전남 보성군교육구 초대 교육감 당선
현인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통일부 장관 역임
현일문, 천문학·풍수지리학·한방의학 등의 학문 익혀

▲현용준玄容駿:1931~2016. 제주시 노형동 출신. 제주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민속학자. 2016년 10월 24일 노환으로 별세. 제주 및 중앙문화재 위원, 예총 제주지부장 역임.

▲현월玄月:1965~?. 본명은 현봉호. 오사카 시립미나미고교를 졸업하고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후 오사카 문학 학교에서 동시집 ‘백아’를 발행하면서 집필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늘의 집’으로 122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였다. ‘나쁜 소문’, ‘말 많은 개’, ‘적야’, ‘이물’, ‘야마다 타로라고 합니다’ 등을 발표하였다.

▲현유순玄維純:1832(순조32)~1901(광무5), 유생. 정의향교의 도훈장. 서교(천주교)에 반기를 들어 신축민란의 원인을 제공했다. 서귀포시 신효<새-쉐둔>에서 현규석의 아들로 태어나 이재를 일으켜 향공진사가 되었다. 

그는 말솜씨가 뛰어나고 재주 있는 해학으로 유명, 한때 제주 명사 신재운(조천), 이기용(오라) 등과 어울려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말과 문구를 교환하였다. 정의향교 훈장을 역임하면서 교임을 맡아 후진을 교육하고 사람됨이 건장하고 훌륭해 사림의 영수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1901년 2월 그가 반천주교 활동을 전개하자 천주교 신자 오달현, 오창우 등 신도들은 그의 주택을 파손시켰다. 또 천주교도에 의해 현유순과 그의 부친 현규석, 또 오신락(효돈) 등 세 사람이 정의성당에서 폭행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일로 오신락이 죽자 이것이 자살이냐? 타살이냐? 가 문제됐다. 

한편, 대정상무사에서 오신락의 죽음을 조사하고자 검시관 대정군수 채구석, 그 배석자 이재수 등이 시체를 확인했다. 이 일로 대정상무사를 중심으로 하는 유림들은 반서교, 반외세를 표방하면서 신축민란을 재촉하는 결과가 됐다.

▲현응호玄應祜:1893(고종30)~1965, 교육자, 전남 보성군교육구 초대 교육감(1952.8.8~1954.2.10). 본관은 연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가스름>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현홍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정의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관비 유학생으로 관립 경성고등보통학교부설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물리학교(현 히토쓰바시 대학(一橋大學))를 졸업했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된 후 완도중학교 교장을 거쳐 1952년 의무교육에 대한 교육자치제가 실시하게 되자 보성군교육구 교육감에 입후보하여 초대 교육감으로 당선됐다. 

관립 경성고보의 사범과는 한성사범학교의 후신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 관제에 의해 설립한 최초의 관학일 뿐만 아니라,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최초의 근대식 학교였다. 

1912년 4월 전남 보성보통학교 부훈도를 거쳐 1918년 모교인 정의보통학교 교사로 부임, 당시 교장 미네-만죠와 교사 이화옥 등 세 사람만이 재임했다. 1922년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보통학교 수석교사로 발령받아 말석으로 부임한 이봉춘(보목)과 함께 향수를 달랬다. 

그는 1939년 오지학교인 여수군 삼일면에 있는 중흥심상소학교 부설 하도간이 학교로 전출돼 여러 해를 보냈다. 이는 중일전쟁으로 일제의 황민화교육의 강화에 따른 그의 민족주의적인 저항심과 최고 학부를 이수한 지식인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협조가 미온적인 데서 온 조치였다.

▲현인택玄仁宅:1954~현존. 제주일고 졸. 고려대 정외과 졸. 정치학박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명박 정부 당시 통일부장관 역임.

▲현일문玄日汶:1846(헌종12)~1915(일제강점기), 천문학자. 일명 현규석, 통칭 현천문이라고 불렀다. 호는 동은. 애월읍 납읍리<과납>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마을의 김용징에게 글을 배우고 나중에는 영운 고경준에게 배웠다. 

만년에는 제주시 노형동<마름> 월산마을 동쪽 은동산으로 옮겨 천문학·풍수지리학·한방의학 등 그에 관한 지식을 넓혔다. 여가에는 스승 고경준을 모시어 깊이 학문을 익히고 문우들과 어울렸다. 

오라리의 학자 이응호는 ‘동은전기(洞隱傳記)’를 지어 그의 개성 있는 발자취를 기록했다. 저술에 ‘지리관건(地理關鍵)’이 있다. 이런 기록과 문헌은 모두 4·3사건으로 회신되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