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정신 실현…퇴임 이후 행적 더욱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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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정의현감을 지낸 인물들(1)

200여 명 현감들의 다양한 행보 

이섬, 바다 위 표류하며 살아남아
김우추, 여진족 상대 대승리 거둬
방덕룡, 임진왜란·정유재란 활약

▲정의현감에 대한 개요

조선시대 때 제주는 바다 건너 외진 곳이어서 관리들이 부임하기를 꺼려했던 지역이었다. 육지에서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지만, 제주에서는 바다를 건너는 어려움으로 대개의 현감들은 혼자 부임했다.

그들의 재임기간은 1년에서 3년 이내였다. 2015년 발간된 『성읍마을지』에는 219명의 정의현감(정의군수 포함) 이름과 재임기간이 수록되어 있으며, 2021년 발간된 『정의향교지』에도 초대 현감인 이이(李貽)로부터 1911년 마지막 정의군수였던 김면수(金冕洙)까지 약 200명의 정의현감이 있었다고 쓰여 있다. 

정의현감으로 재직했던 인물들에 대한 행적은 사료에 아주 짤막하게 언급되거나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추후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리라 기대해 본다. 

▲역사에 뚜렷한 이름을 남긴 정의현감들

행적이 기록된 정의현감 가운데에는 재임 중 선정을 펼쳐 칭송받는 이도 있는 반면 폐정을 하거나 왜구에 대한 대처를 소홀히 하여 파직된 자도 있다. 

또한 재임기간보다는 퇴임 이후의 행적으로 더욱 주목을 받은 자도 있다. 다음은 정의현감을 지낸 이들 중 상대적으로 조정에 충성을 다하거나 애민을 실현한 인물에 대한 소개의 글이다. 

△표류하여 중국을 떠돈 이섬(李暹)

홍문관 직제학으로 있던 점필재 김종직은 이섬의 표류견문을 듣고 왕명에 의해 이섬행록(李暹行綠)을 지었다. 다음은 이섬행록에 쓰여진 내용들이다. 

1483년(성종 14) 임기를 마친 정의현감 이섬(李暹) 일행이 탄 배가 뭍으로 가기 위해 제주를 떠나는 중 추자도 부근에서 표류, 중국의 양저우와 베이징을 거쳐 귀국한다. 

이섬이 탄 배에는 정의현 훈도 김효반, 호장 한진 등 47명이 타고 있었는데, 열흘을 떠다니다가 중국 양주 지방에 이르렀다. 일행들은 굶주림에 지쳐 나무를 비벼 불을 얻어내고 바닷물로 밥을 지어 먹기도 했다. 

이때 이섬과 김효반 등 살아남은 33명은 변방을 침범했다는 죄명으로 심문을 받기도 했지만, 이섬의 기개로 중국 관리를 설복하고 죽음을 면한다. 

이후 북경으로 이동한 이섬 일행을 마침 천추사(千秋使:조선에서 중국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로 중국에 와있던 박건이 대동하여 귀국한다. 

이섬의 행적에 대해서는 『성종실록』과 1488년 표류생활을 했던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에 기록되어 있다. 귀국한 이섬에게 성종은 다섯 직급을 올리는 파격적인 상을 내렸고, 그의 일행에게도 많은 포상이 내려졌다. 이섬이 양주를 떠날 때 중국관리인 사사원(謝士元)에게 써준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강남의 명승지는 바로 양주 땅(江南勝地是楊州:강남승지시양주)/ 청작 황룡이 서루에 그려져 있네(靑雀黃龍裁書樓:청작황룡재서루)/ 노를 잡아 돛을 펴고 푸른 물에 떠가니(卬枻張帆浮碧水:앙설장범부벽수)/ 저문 날 쓸쓸한 달이 사람 따라 흐르네.(暮天凉月逐人流:모천량월축인류)

△녹둔도에서 크게 활약한 김우추(金遇秋)

김우추의 행적은 향토사학자 김찬흡 선생이 제주일보에 연재한 「제주인물 대하실록」에 적혀 있다. 

1570년과 1572년 사이 정의현감으로 재직한 김우추의 행적은 찾기가 매우 어려우나, 조선의 역사에는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김우추다. 1583년(선조16) 이탕개(泥蕩介)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북병사 이제신(李濟臣)이 이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1587년에 녹둔도를 침입한 여진족을 북병사 이일과 우후(虞侯) 김우추 등은 병력을 이끌고 제2차 여진정벌에 가세해 대승리를 이끌었다. 우후는 북병사의 보좌관으로 함경도 군사체계에서 2인자의 직책이다. 

이때 김우추 등은 기병 400여 명을 이끌고 여진족 33명을 베는 전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이를 녹둔도(鹿屯島) 사건이라 한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면서 전공을 쌓고 승진하여 이후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하는 토대가 만들어진다. 조선이 지배하던 두만강 하구의 섬인 녹둔도는, 연해주가 1860년 러시아 영토가 되면서 졸지에 잃어버린 영토가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방덕룡(方德龍)

1592년과 1595년 사이 정의현감으로 재직한 방덕룡은 재직 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지만, 역사에는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원균(元均)의 휘하에 들어가서 크게 활약하였고, 1596년에는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부사(府使) 이영남(李英男), 만호(萬戶) 안여종(安汝棕)과 함께 절이도(折爾島)에서 복병(伏兵)하였다가 왜군을 협공하여 크게 이겼다. 

이후 문천군수를 거쳐 낙안군수(樂安郡守)로 부임하였다. 1598년 낙안군수인 방덕룡은 명나라 장수 이천총(李千總)과 합세해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낙안군수 방덕룡이 용감하고 지략이 있다고 하여 선봉장으로 삼았다. 

1598년 11월 18일 노량해전(露梁海戰)이 일어나자 통제사 이순신,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과 함께 결사적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적을 무찔렀으나, 왜군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이 전투의 승리는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선조는 그 절의를 가상하게 여겨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추증하고, 대대로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다.

글·사진=강문석 (사)질토래비 전문위원·성읍별곡사진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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