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묵을 휘두르는 그의 생활…신선과 거리 멀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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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서예대가 현중화

현정국,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 역임
현중화, 제주 소묵회 창립… 제주문화상 수상
현지준, 한의학에 일가견…초대 서귀읍장 취임

▲현정국玄正國:
~2010, 한경면 용수리 태생. 제주농업학교 졸업(연35회). 제주시 건입동에 살면서 한일양조장 대표,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 제주상공회의소 부회장.

▲현중화玄中和 :

1907(융희1)~1997, 서예가. 교육자. 호는 소암, 본관은 연주이며 서귀포시 법환동<법하니>에서 현지준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2년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과 전문부 2년을 졸업, 1937년 일본 서도계의 대가 마츠모도<松本芳翠> 문하에서 3년 사사했다.


이어 마츠모도의 친우 ‘쓰시모도’<迅本史邑> 문하에서 8년 간 글씨를 배워 육조체<六朝体>를 습득하고 행서에 몰입하였다. 정부에서는 2000년 10월 20일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의생이었고 면장을 역임한 아버지의 엄격한 훈도 아래 한학과 서예의 기초를 익혔다. 


그는 본시 노자의 도덕경에 심취하여 스스로 호를 소암이라 하고 70세가 되어 소옹이라고 썼다. 


늘 부친께서 의사의 길로 나가라는 당부에 그 길로 나아갈까 했지만 색맹이 심해 그러지도 못해 붓으로 검은 먹을 택하는 예술의 길로 나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서귀보통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1923년 제주농업학교에서 제1학년을 자퇴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5년 오사카의 영국 밋숀계 학교인 사립 모모야마<桃山>중학교 3년을 수료, 1928년 동경으로 옮겨 수가모<巢鴨>상업학교에 입학하여 4학년 때 문학박사 엔토<遠藤隆吉> 교장이 담당한 노자의 도덕경을 수강하면서 노장철학에 심취하였다. 

조국이 광복된 뒤에도 일본에 남아 일본 국내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 매일신문 서예전에 연 3회 출품하여 수상, 또 전일본서도에서 1회 수상, 기타 민전에 출품하여 8차에 걸쳐 수상하였다. 1946년에 동경 다이쇼중학교에서 3년 간 재직하면서 녹담서도원을 개원, 또 재단법인 일본서도원 대의원을 역임, 1948년 6년 간 재일거류민단 도쿄 태동지구 부단장 겸 총무로 재직하였다. 1955년 2월 귀국하여 제주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제주대학에서 윤리학 강사로 출강하였다. 
1957년 서귀중학교 교사로 옮겨 제6회 국전에 처음 입선, 1959년 국전운영위원회에서 추천작가로 선정되고 1963년 국전 심사위원으로, 1965년 영주연묵회를 청탄 김광추와 함께 발기하였다.

 
1967년 11년 간 재직하던 서귀중학교를 그만두고 남농의 초청으로 목포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이듬해 광주에서도 세 번째로 개인전을 개최하고 1769년 제주도문화상을 수상, 1972년 제주소묵회를 창립하여 지도하였다.


1973년 목포소묵회를, 이듬해 서귀포소묵회를, 1980년 대구소묵회를, 1981년 광주소묵회를 창립하여 전소묵회로 연합 합동전시회를 갖기도 하였다. 1982년 중화민국 서법계를 순방하고 이듬해 중화민국 국립역사박물관 초대전을 가졌다. 

서예대가 소전 손재형이 평하기를 “육서체를 소암은 고루 썼으나 행서와 초서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라고, 또 청명 임창순옹은 “서귀포 조범산방으로 소옹을 방문한 이래 몇 차례 만남이 있었다. 옹은 홍안장염의 선풍을 가졌으며, 서재는 멀리 태평양의 바람을 호흡하는 위치에 있으니 한묵을 휘두르는 그의 생활은 신선과의 거리가 멀지 않은 듯하였다. 옹은 일생 다른 길을 걷지 않고 오직 글씨를 생명으로 여겨 그의 작품은 마음과 손이 함께 무르익어 붓이 노래하고 먹이 종이 위에 춤추면서도 조금도 어색함이 없음은 그의 적공에서 오는 것이다”라 하였다.

 
소암의 서실을 조범산방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서재에 앉아 멀리 태평양상에 떠 있는 돛단 배, 그를 바라보는 것을 낙으로 삼는 다는 뜻이다. 이 서귀포 소암 자택 바로 이웃 남쪽에는 초대 남제주교육감을 역임한 강운옥의 집이 있었다. 


하루는 의업을 하는 강옹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의 집은 너무나 초라하여 남보기가 민망하니 새로 3층으로 올려 신축해드리겠습니다.”고 간청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깜짝 놀라면서 소옹은 이 나라의 국보적인 존재인데 집을 짓는다면 가려져 조범산방이 없어진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이 일갈에 아들의 정성은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옹은 그대로 소박한 단칸방에서 시음에 몰두, 소옹이 타계하기 6년전에 이승을 떴으니 떠날 때까지 바로 이웃하며 살았다.

그의 문하생들에 의해 1989년 8월 ‘소암 현중화 서집’을 발간, 세상에 소암의 글씨를 다시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소암은 1997년 11월 11일 ‘제3회 의재 허백련 예술상’수상자로 결정되었다. 광주시는 시상식을 갖고 상금 1천만원을 소암에게 전달하고 11월 20일부터 11일 간에 걸쳐 시립미술관에서 ‘소암선생 기념집’을 개최하였다. 


광주시에서는 전통예술의 뿌리를 내리게 한 의재 허백련 화백의 높은 작품 세계를 기리고 미술인들의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매년 의재예술상 수상자를 선정, 시상하고 있다. 소암은 이 상을 수상하고 21일 후인 12월 3일 타계하였다. 


▲현지준玄至濬 : 1884(고종21)~1986 의생, 한의사, 서귀읍장, 서귀포시 법환리에서 현상원과 양씨를 부모로 하여 태어난 선생은 한학을 배워 한의학에도 일가견을 이룬 분이었다. 


923년 의생시험에 합격하였다. 서귀포에서 먼저 개업한 뒤에 남원면, 중문면 등지까지 무의촌을 돌면서 종두와 예방주사를 실시하고 1945년 8·15 광복으로 국권이 회복되자 초대 서귀읍장에 취임하였다. 우리나라 서예대가인 소암 현중화가의 선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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