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 위하는 정신 으뜸으로 삼고 선정(善政)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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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정의현감을 지낸 인물들(2)

역사에 남은 현감들의 업적

김성구, 폐단 찾고 개선코자 노력
위혁만, 흉년 중 백성 구활로 치적
이갑룡, 청렴과 공평 최우선 삼아
장용견 정의군수는 1912년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 양어장 기반을 구축하고, 1923년에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 후원자로 활동했다. 사진은 장 군수가 조성한 식산봉 앞 양어장 주변 모습.
장용견 정의군수는 1912년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 양어장 기반을 구축하고, 1923년에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 후원자로 활동했다. 사진은 장 군수가 조성한 식산봉 앞 양어장 주변 모습.

▲선정을 펼친 정의현감들


옛 흔적이 있는 곳에 가면 발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거슬러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자. 잠시 호흡을 멈추면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옷차림, 행동거지 등이 눈에 들어오고, 그러면서 당시의 생활 맥락을 잡아보는 재미가 있다. 정의현청 관아지는 이런 재미가 풍성히 솟아나는 곳이다. 당시 정의현의 백성들은 자갈 많고 메마른 토지에서 농사를 짓다 보니 거의 매년 흉년일 정도로 어렵게 생활했다. 바닷가 사람이나 테우리(목동)의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현감들도 육지와는 완연히 다른 풍토에 적응하려니 어려움이 많았을 테지만, 중앙의 통제에서 사실상 벗어난 외진 곳의 우두머리로서 어려운 백성을 탐학해 배를 불리는 일이 허다했다. 풍류 생활을 즐기다 임기를 마친 자도, 공적인 사료에는 없지만 유배자의 기록 등에 언급되는 탐관오리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백성을 위하는 정신을 으뜸으로 삼고 선정을 펼친 몇 명의 현감들은 마땅히 우리가 그의 행적을 밝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귀감으로 삼을 필요가 있겠다. 또한 이들의 업적으로 인해 정의현의 역사문화는 한결 풍성해지리라.


▲‘남천록(南遷錄)’을 남긴 김성구(金聲久) 


김성구는 관직 생활 내내 공사를 분명히 하여 경북 안동의 백록사에 제향됐다. 남천록은 정의현감 시절의 경험과 개인 감정을 작성한 일기로, 김성구의 시문집인 ‘팔오헌집(八吾軒集)’에 수록돼 있다. 이를 통해 당시의 행적과 정의현의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있다. 1679년(숙종 5)에 부임하자마자 제주에 관한 책들을 섭렵해 현지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후에 정의현감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정의현 백성들에게 폐단이 되는 것들을 찾아내어,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해산물 진상을 담당했던 포작인들의 궁핍한 삶을 목격한 김성구 현감은 어물진상 이외에 포작이 부담하는 각종 부역을 폐지하거나 경감시켜 주었고, 미역과 전복을 사들여서 육지에 판매한 후에 얻은 이윤을 진상물 조달경비에 보태도록 했다. 감귤을 상납하는 농부와 말을 관리하는 테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상부에 진정해 부담을 줄여주고자 했다. 정의현감을 마친 후 귀향해 늘 말을 타고 다녔는데, 그 말을 가리켜 정의산이라 자랑했다 한다. 정의현감 시절 김성구 현감이 시행한 많은 선정에 대한 백성들의 선물이라 전해진다.

▲임금으로부터 어마(御馬)를 하사받은 위혁만(魏赫萬)


위혁만의 정의현감 재임기간은 1716년(숙종 42)부터 1718년까지이다. 재임 기간 중 흉년을 만나 백성을 구활(救活)한 치적이 임금에게 알려져 상으로 말 한 필을 하사받았으며, 그 후 그가 역임했던 지역마다 공덕비가 세워질 정도로 선정을 펼쳤다 한다. 남원읍 남원리에 위혁만청덕선정비(魏赫萬淸德善政碑)가 있다. 위혁만에게 왕이 유시했던 공문이 남아 있다.
“정의현감 위혁만에게 유시하노라. 지금 제주 전 목사 홍중주가 필진장(구휼을 마쳤다는 보고서)을 보고한 것을 보니 네가 비축한 곡물을 비록 심히 많게 빌려주기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농우의 힘에 맞게 개간하였고 끝내 죽게 생긴 사람들로 하여금 생업에 복귀시킨 정성을 쌓음이 극에 이르렀으니, 가히 칭찬하여 특별히 잘 길든 말 1필을 하사하니 너는 이것을 받으라.” 


▲‘남계집(南溪集)’을 남긴 이갑룡(李甲龍)


이갑룡의 정의현감 재임 기간은 1784년(정조 8)부터 1787년 사이이다. 51세 때 정의현감에 제수됐다. 그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 청렴하고 공평한 것을 최우선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즐거워하며 “옛날에는 김현감이 유명했고 지금은 이현감이 있네”라 했다. 떠날 때 고을의 물건은 하나도 손대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올 때 떨어진 갓을 쓰고 오시더니 갈 때도 떨어진 갓을 쓰고 가시는구나”라 했다. 그가 얼마나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는지는 다음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1785년(정조 9) 진휼청이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아뢴다. “정의현감 이갑룡은, 애써 마련한 곡물이 비록 100석에 차지 못하고 분주히 노력한 것 또한 직분 상 당연한 것이지만 섬에서 받는 작은 녹봉은 육지와는 다르니 그 노고를 논한다면 완전히 민멸시켜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이하 생략)”하니, 임금께서 “이갑룡을 4품직에 제수하라” 했다. 


당시 정의현감은 종6품직인데, 이를 4품직으로 올린다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재임 후 곧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가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허승(許昇) 등 기억해야 할 정의현감들

정의현감의 재임 기간은 1735년(영조 11)부터 1737년 사이이다. 정의현성의 동성 문루(門樓)인 동문루가 초옥인 것을 기와로 바꿨다. 또 부역을 간편하게 하니 백성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이외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현감들이 여럿 있다. 자신의 녹봉을 들여 군기와 관사 성곽을 보수했던 박종림(朴宗林), 제주도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된 ‘안민고절목(安民庫節目)’을 제정한 인물인 윤신흥(尹莘興), 선정을 베푼 공로로 임금으로부터 현궁(弦弓)을 하사받은 임광현(任光鉉), 제주 출신으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애썼던 변경우(邊景祐), 흉작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자신의 곡식을 내어 구해내고 오흥태 의사묘(吳興泰 義士廟)를 건립한 구병우(具秉愚), 1907년 한 말 정의현감으로 부임해 향사당을 중수하고 의명학교(義明學校)를 설립했으며, 1912년 성산읍 오조리 양어장 기반을 구축하고, 1923년 민립대학 설립 운동 때 후원자로 활동했던 장용견(張容堅) 등도 기억할만한 정의현감들이다. 정의현 관아지에는 정의군수 채수강(蔡洙康)과 강우진(康祐鎭)의 선정이 기록된 비가 세워져 있다.

 

글·사진=강문석 (사)질토래비 전문위원·성읍별곡사진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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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2024-02-07 11:40:37
소중한 보물같은정보 고맙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