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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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도평초등학교 교장, 수필가

비움이란 어려운 숙제이자 뿌듯한 보람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새해 들어 첫 최소화한 삶의 실천, 무엇을 얼마나 많이 비우는가도 중요하지만 비울수록 어떻게 비울까 하는 고민도 동반됐다.

아이들이 육지로 떠난 후 ‘삶을 단순하게 디자인해보자’라는 야심 찬 꿈을 실천하기 위해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건에 대해 버리지 못하는 애착이 많은 편이라 불필요한 물건이 쌓여 아이들이 떠난 방은 창고가 되고 방학 연례행사로 정리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과감하게 정리하자면서도 버릴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한다. 왜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주방 구석구석에는 언젠가 꼭 쓰일 거라는 생각에 버리지 않은 양파망, 음식 통, 페트병 등이 쌓여 있다. 김밥 주문에 딸려온 주스 통은 당근을 연상케 하는 예쁜 둥근 마개가 있어서 깨끗히 씻어 놓으니 음료수 병으로 사용하면 훌륭할 듯하다. 삼다수 페트병엔 콩을 담아 보관하면 안성맞춤이고, 양파망도 수세미로 재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수납장에는 멀쩡한 유리 반찬통이 이미 넘쳐나고 살 때부터 지퍼팩에 포장돼 있는 콩도 굳이 옮길 필요가 없다. 찌든 때를 지우개처럼 지워주는 수세미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 양파망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다.

부엌의 자질구레한 물건을 넘어 옷장 속 사정도 마찬가지다. 패션은 돌고 돈다고 해 몇 년 째 옷장 속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옷은 나를 패셔니스타로 만들어 줄 것 같다. 그런데 상상과는 달리 빨간 멜빵 치마는 지금 입기엔 유치하기 짝이 없다. 말로만 듣던 명품 코트 하나를 세일 한다기에 주머니를 쥐어짜 마련한 코트는 한동안 애지중지 입었는데 지금은 명품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보가죽이 헤져 입지 못하게 됐다.

어느새 나의 공간은 돈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돈이 우선이 돼 자리를 잡은 물건은 비단 코트만이 아닌 수 년 째 건들지도 않은 구두, 집안 곳곳을 채운 무거운 엔틱가구, 거창한 주방용품 등 셀 수 없이 많다. 어디 이 뿐인가. 키 닿지 않는 벽장 위 선반은 타임캡슐이다. 배냇저고리부터 첫 한복, 사진첩 등 추억을 모아두다 보니 상자는 해마다 늘어났다. 과거에 집착이 돼버린 ‘추억의 물건’은 미래에 대한 집착으로 ‘나중에 쓸 일이 있을 물건’이 돼버리고, 남길 것과 추억의 물건을 구분조차 어려웠다.

사실 나는 버리지 못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다. ‘여기, 그리고 지금’에 집중하기로 했다. 옷은 사는 것보다 내 옷장을 즐기자. 무작정 비우기보다 낭비 없이 다 쓰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성숙한 자세임을 깨우치게 됐다. 물건도 정서적 관계를 맺고 있기에 시간과 구역을 정해 애착이 적은 물건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제 쓸지도 모를 것들과 과감히 이별했다. ‘이것을 갖고 있어서 행복하고 자유로운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미련과 집착이다. 내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 정신적 치유와 선순환의 환경적 정리다.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물건과 이별하듯 휴대전화기에 꽉 찬 공허한 인간관계도 하나둘 정리해본다.

일상의 수많은 계획과 끊이지 않는 업무와 도전들. 비움은 삶의 여백, 이제는 가볍게 살고 싶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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