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움츠렸던 민족적 긍지 되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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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조선의 주먹 현해남

현집, 1613년 2월 광해군 재위 중 제주목사로 도임
현천욱, 서울대 법대·하버드 로스쿨 졸업·국제변호사 
현평효, 제주어 연구에 몰두·제주대 초대 총장 역임
현해남, 전일본 권투 선수권대회 우승·페더급 챔피언
현호옥, 일본노조 전국협의회서 항일활동·노동운동

▲현집玄楫:생몰년 미상, 제주목사. 1613년(광해군5) 2월, 목사 이현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616년 4월에 체임되었다.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되면 아비인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또 한명련·정충신·기자헌·현집·이시언이 불측한 생각으로 변란을 꾀한다고 고변했다.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임이 밝혀져 조사 담당관들은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고까지 했다. 이괄은 현집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한 바 있었다.

▲현천욱玄天旭:1953~현존. 제주시 용담리 출신. 제주대학교 총장 현평효의 장남. 서울대학교 법대 졸. 사법고시 합격, 하버드 로스쿨 석사 졸업, 국제변호사, 서울대학교 국가미래전략원 자문위원, 김&장 법률사무소 소속.

▲현평효玄平孝:1920년(일제강점기)~2003, 교수, 제주대학장, 호 연암(延巖), 본관 연주(延州), 애월읍 어도리(도너미:현 봉성리)구몰동<구머리>에서 봉준을 아버지로 어머니 양보아와 사이에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김열과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일찍이 서기로 일하면서 상업학교를 다녔다. 간사이대학 전문부 법률학과에 입학했다. 8·15 해방 후에 귀국하여 동국대학교를 졸업, 평생을 제주어연구에 몰두했다. 제주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하고 2003년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자식들에게 중·고등학교 때부터 국제화시대에 대비하여 3개 외국어는 독파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고학하며 느꼈기 때문이다. 이에 장남 현천욱도 국제화 마인드가 생기고 스스로 일찍이 국제변호사의 길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도미하여 하버드 법과대학에서 공부하고 미국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해 이 분야의 선구자로서 성공을 할 수 있었다.

▲현해남玄海男:1917(일제강점기)~1994, 체육인. 권투 선수. 본관 연주, 성산읍 신산리<그등애> 태생. 일본 도쿄에서 본소실업학교를 졸업, 1935년 일본권투회에 입회하여 이듬해 전일본 밴텀급 선수권대회에서 우승, 또 1937년 3월 6일 일본인 오이케를 꺾고 페더급 챔피언을 획득하였다. 


한때 일본 권투계의 강자 피스톤 호리구치를 이기자 전일본에 그의 명성이 자자했고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교포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1938년 동양 페더급 선수권 대회에서 선수권을 획득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2년 동안에 걸쳐 수련을 쌓고 돌아와 일본에서 후배 양성에 몰두하였다. 한국인은 피압박 민족으로서 일본인에게 눌려 살던 때라서 파일럿으로 명성을 날린 안창남, 자전거로 명성을 떨친 엄복동,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등이 배출될 때마다 움츠렸던 민족적 긍지가 되살아났다. 마침 권투계의 왕자 현해남이 혜성같이 나타나자 소리 높여 “떴다 보아라/안창남, 굴렀다 보아라/엄복동, 달렸다 보아라/손기정, 쳤다 보아라/현해남, 만세! 만만세!”라는 유행어가 금수강산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현호옥玄好玉:1913(일제강점기)~1986, 일본 오사카에서 전협의 항일활동. 본관은 연주, 현승오의 손녀, 현길홍의 장녀로서 성산읍 성산리에서 태어났다. 


신학문·신교육에 대한 이해가 깊어 장남 현길홍은 가업을 잇게 하고 차남 현이길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도록 했다. 


현호옥은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자전거 공장 여공으로 일하였다. 오빠 현호경의 영향을 받아 1933년 2월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화학노조 오사카지부’의 회원으로 가입, 동년 남해고무공장 여공으로 ‘오사카지구 동북구 남해공장 분회원’이 되었다. 1934년에는 ‘전협 오사카지구 화학노조 준비회’ 부인부장 및 동지구 야츠이 고무공장 반 부인부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메이데이 및 기타 노동운동에서 투쟁하였다. 


또 오사카 히가시나리꾸 방면에 산재된 고무공장의 한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적색스포츠단의 단원확보에 노력하는 한편 전협 일본화학의 조직에 착수했다. 1934년 2월 초순 스포츠단준비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러 한인 호시노모를 책임자로 하고 조직부 사토모와 육복용, 문서배포계는 성철성, 부인부는 현호옥, 가두부와 김대제와 김충권 등의 각 전문부서를 결정한 바 있다. 멤버 포섭에 힘쓰는 가운데 육복용과 성철성은 동년 4월 일본공산당에 입당해 활발하게 활동을 계속했다. 1934년 메이데이 당일에 비합법적 메이데이를 감행할 계획을 착착 준비하던 중에 탐지되어 동년 4월 11일, 육복용, 성철성 이하 19명이 검거될 때 그녀도 검거되어 동 7월 20일 전협 동지 19명과 함께 송치되었다. 1935년 10월 26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후일 가파도 출신 남자와 결혼해 세상 번뇌를 다 잊고 지내더니 1986년 대정읍 하모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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