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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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찬, 수필가

우리의 조상들은 음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원단, 세수라 했으며 일반적으로 설이라 하며 새해맞이 떡국차례를 하고 한 살 더 먹는 전통으로 삼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려고 양력 1월 1일을 명절로 하라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전통을 지켰다. 이후에도 정부의 신정 독려 정책에 공무원을 중심으로 신정을 설로 쇠는 일부 가정도 있었지만, 일반 가정의 설 문화를 지키려는 의지를 억지로 바꾸지는 못했다. 결국 1989년 법정 공휴일로 설날이 복원되고 3일 공휴일로 정하게 됐다.

설날은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조상께 차례를 지내면서 음덕을 기리고, 마음 속으로 소망을 기원하면서 가족의 화합뿐만 아니라, 친족과 마을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세배드리는 민족의 대명절인 것을 모르는 이는 없지만, 선진국이 되면서 너무나 퇴색돼 버린 설날을 혁명공약을 외우던 망팔이 지난 노인의 노파심에서는 이러다 그 의미를 잊지나 않을지 걱정이 된다.

여명까지는 두 시간도 더 기다려야 하는 시간, 본 명절 전에 국수 명절부터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밤새 정성스레 만든 메밀국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역시 설날의 꽃은 세배다. 차례를 마치고 눈에 미끄러지면서 온 동네 어르신께 빠짐없이 다녔다. 아버지는 술잔을 들었고 나는 떡을 실컷 먹을 수가 있었다. 때로는 10원짜리 동전이나 지전을 받는 행운도 있었다. 차량이 없던 시절 세배하려고 나서면 대가족 시대 많은 형제가 한 덩어리가 돼 다니다가 서로 만나면 길 가운데에서 각자 돌아가면서 손을 잡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악수하는 장면을 숱하게 볼 수가 있었는데,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세배 다니는 요즈음에는 전설이 됐다.

세배를 꼭 가야 하는 집이 있다. 예전에는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동네 젊은이들이 상여를 메고 장지에 가서 무덤을 완성했다. 지금처럼 장례식장에서 통상 3일 장을 치르는 게 아니라 일주일이나 그 이상도 좋은 날을 택해 장례를 치렀다. 벽장 한쪽에 상을 차려놓고 생전에 모시듯 음식을 올렸다.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삭망과 소상 대상을 하는데 이를 모시고 있는 집은 거르지 않고 가서 예를 올리고 상주에게도 위로하면서 세배했다.

일자리를 찾아 바다 건너갔던 많은 사람이 명절이면 귀향을 했다. 공휴일이라고 여행 떠나는 사람들뿐 아니라 차례 지내는 게 고역이라고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불참하고는 영화관이나 풍광을 즐기는 한심한 사람들도 있다. 조상을 외면하는 자 성공할 수가 없다. 성공의 길은 천태만상이지만, 조상이 걸어간 길과 후손이 효도가 척도가 되는 음덕과 태어난 환경, 그리고 자신의 노력이 집합된 사주팔자에서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가 없는데, 근본적으로 참신한 마음으로 행하는 세배는 이 모든 것을 감싸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세배할 곳이 있을 때가 행복한 때이고 없거나 줄어들면 외로움이 벗하자고 한다. 설날 나는 얼마나 세배했는가. 세배를 못 해 안부라도 전한 사람들은 부담 없이 청룡의 해에 은총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할 것이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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