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자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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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 C&C 국토개발행정연구소 소장/논설위원

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이 엄습하는 상황에서 조선의 선각자들은 서양 문명에 대한 수용 논리로, 전통의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를 유지한 채 서양의 기술과 기기(器機)만을 받아들여 국가의 자강(自强)을 이루어야 한다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나,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하되,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청나라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에 집착했다. 이들은 중국의 전통사상과 가치관·문화를 존중하면서 서양 기술과 기기 등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당시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동아시아의 낡은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서구의 문화와 사상, 종교 등을 적극 받아들여 부국 자강을 도모해 나가야 한다는 소위 ‘문명개화론’을 주창했다. ‘서구화=근대화’라는 인식하에서 그는 서구의 문화와 풍속까지도 전면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당대 서구 국가들을 문명개화국으로, 일본·중국 등을 반개화국으로 구분하면서, 일본이 자존과 독립을 지켜나가려면, 자국 외에는 오랑캐라 천시하고 배척하는 중국의 사상이나 유교 사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구의 지식과 정치·법·기계·의식주의·풍속 등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론(脫亞論)’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결과 일본에는 서구의 문화만이 문명이고, 다른 문화는 야만이라는 형태로 이분법적 구분이 나타났다. 전통의 문화와 풍속은 열등하게 여기고, 서구의 문화와 풍속만을 추종하는 잘못된 근대화론이 대두됐다. 이런 사조(思潮)는 결국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시키는 논리로 변질되는 모순을 낳기도 했다.


그렇지만 후쿠자와는 인류사회가 미개·반개화·문명개화의 단계로 일원론적으로 줄기차게 발전하고, 문명개화의 발전 단계에 있는 미국과 유럽의 문화가 일본 문명화의 보편적 기준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의 지론을 받아들인 일본은 1869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국가변혁을 과감히 단행했다. 


그 결과 일본의 서구화가 곧 국가사회 발전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을 낳기도 했으나, 일본은 어떻든 급속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국가발전을 앞당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신구범 전 지사는 관선과 민선 2기 제주도백을 역임했다. 그는 짧은 재임 기간에도 많은 것을 일궈냈다. 그는 생전에 “제주 스스로 ‘부도자강책(富道自强策)’을 마련해 자립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소위 ‘제주자강론’을 늘 강조했다. 


삼다수 사업 등 남다른 그의 치적들은 그런 사유물(思惟物)이 아닌가 한다. 물론 그의 삶의 궤적과 소신은 저서 ‘삼다수 하루방, 길을 묻다’에 녹아있다. 그의 당찬 포부 또한 그 책 속에 살아 있다. 


필자는 2022년 8월 말경 제주항 근방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때도 그는 ‘제주자강론’에 대한 자부심과 아쉬움, 제주 4·3문제로 둘로 갈라진 채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 직면한 제주사회에 대한 격정(激情)적 소회는 큰 울림으로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바라건대, 그의 탁월한 ‘제주자강론’이 후대에 전승·발전되어 제주발전 책략의 기본이 되었으면 한다. 미래 제주발전의 밑천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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