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의 권익 실현을 위해 앞장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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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투사 현효섭

현호진, 일본 오사카에서 항일활동·노동운동 
현화진, 제주교육의정회 회장·교육위원 등 역임
현효섭, 재일본조선거류민단 효고현 단장 등 역임
형성해, 경상대학장 역임·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1946년 10월 3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출범한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민단은 현재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인받은 재일동포의 유일한 공인단체다. 현효섭은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에서 효고현 단장을 역임했다. (사진=재일대한민국민단 제공)
1946년 10월 3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출범한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민단은 현재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인받은 재일동포의 유일한 공인단체다. 현효섭은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에서 효고현 단장을 역임했다. (사진=재일대한민국민단 제공)

▲현호진玄好珍:1907(윤희1)~1948(미군정기), 일본 오사카에서 공산당의 항일활동. 가명은 김태련, 본관 연주, 사업가 현승오(일명 갑룡甲龍)의 장손이며 현길홍의 장남으로 성산읍 성산리<성산포>에서 태어났다. 현호진은 1925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아우 현호경, 누이 현호옥 등 3남매는 함께 당 활동과 노동운동을 통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다. 


1934년 6월 30일 검거 당하여 송치되어 동년 12월 20일 나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11월 전협 화학 노조 오사카지부 책임자 조몽구의 소개로 가입하여 화학 프랙션으로 효고현에서 조직 활동에 힘썼다. 현호진의 조부 현승오는 성산포에서 사업에 착수하여 이재로 크게 성공하였으며 각처에 거금을 희사한 당대의 독지가였다. 


현호진도 문창래, 김달준, 현석헌, 김동인 등과 함께 전협에 관계하지 않은 순수한 민족주의자로서 ‘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제주통항조합을 결성, 일본 사업가들의 독점 항로에 맞서 운영한 바 있다. 이 통합조합이 운영은 온 제주도민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1930년 3월 25일에는 ‘제주 동아통합 조합 뉴스’ 창간호 500부를 발간한 바 있었다. 


1931년 12월 ‘일본 노동조합 전국협의회 토건노조오사카지부’ 회원과 연락을 취하면서 일본공산당과 연계되고 있었다. 1933년 4월에 ‘전협토건노조 오오사카지구 준비위원회’ 위원이 되어 지구 기관을 조직 행동대원으로 활동, 동년 9월 하순 강주호(중문 상예) 등 다수가 피검되어 공산당 조직이 궤멸 상태에 이르자 1934년 5월에 관서지방위원회 오사카 시위원회가 재건되었다. 


이때의 조직은 일본공산당 내의 분파 가운데서 검거를 모면한 잔류자들이 그 주요 세력이 되었다. 현호진과 구좌읍 하도 태생들인 고진호·이영복·김만선·현상호 등은 시내 동북지구 남지구 등지에서 ‘나가야도모노까이’를 조직, 집세·전기 요금·수도 요금·가스 요금 등의 인하, 면세 투쟁을 벌여 재일 한인의 혁명의식 앙양에 노력하였다. 나가야도모노까이란 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또 이들은 1934년 3월에 ‘적기독자 그룹’을 조직하여 그 인원을 확대에 나갔다. 

▲현화진玄化珍:1928~2018. 표선면 성읍리 출신. 제주교육의정회 회장. 중문중·중문원예고·서귀중학교 교장을 지냈고 제주교육삼락회 회장과 2,3대 교육위원 등을 역임했다.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 현효섭은 건청에서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사진=재일대한민국민단 제공)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 현효섭은 건청에서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사진=재일대한민국민단 제공)

▲현효섭玄孝燮:?~1949, 재일 청년운동가. 건청 부위원장. 본관은 연주이며 서귀포시 보목리<볼래남-캐>에서 현규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어렵게 살면서 일본인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감격과 환희에 가득 찬 교포들은 동년 9월 10일 재일조선인연맹 중앙위원회를 결성, 이를 약칭 조련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련이 좌익단체로 변신, 북한을 지지하자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청년들은 그해 11월에 따로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建靑)을 결성, 이 건청의 위원장은 박열(경남)이다. 1948년 10월 28일 개편 대회 시에 현효섭의 반탁 투쟁이 인정되어 그가 부위원장에 당선되었다. 


1946년 10월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을 결성하여 박열을 초대 단장으로, 고순흠(조천)이 중앙총본부 초대의장에 추대될 때 현효섭의 역할이 컸으며 그는 효고현의 거류민단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1월 13일 대한민보 사장이며 건청 부위원장 현효섭은 우에노의 후지호텔 앞에서 범인 한기영(민청 조직부장) 등에 의해 권총으로 암살당하였다. 


암살당한 현효섭은 거류민단 측의 투사로서 고베의 민족교육사건 때에 한청원의 참가를 저지했다. 또 미군 M·P(헌병)의 검거에 협력한 것이 조련과 민청 측으로부터 표적이 되었다. 또 건청 효고현 위원장 문동건과 민단 중앙 총단장 박열 등도 표적의 대상으로 보았다고 전해진다.

▲형성해刑誠海:1918(일제강점기)~?, 교수. 대학 학장. 중문면 중문리<중-물> 태생, 1943년 일본 북해도 대광수의축산전문대학을 졸업, 동년 조선총독부 농업시험장 기수로 재임하였다. 광복 후 국립가축위생연구소 기좌로 재임하였다. 


1953년 진주농과대학 교수를 18년 재임한 후 1968년 일본 마포수의대학에서 수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 1972년 경상대학장으로, 동년 경상남도교육위원회 부의장에 뽑혔다. 또 학계에 기여한 바가 크며 아울러 지역사회 발전에도 공헌이 지대하여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 자연과학 부문에서 경상남도 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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