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농업학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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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홍계표

홍걸, 제주목사 이괄 후임으로 도임…현직서 사망
홍경섭, 제주판관…‘귤림서원지’ 수찬하게 해
홍경옥,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 통해 항일활동
홍경표, 회사 운영·제주농중 재학 중 진혼가 작곡
홍계선, 대정현감 재임·흉년 때 기민 구제 기여
홍계표, 제주농업학교 황민화(皇民化)에 반발
1938년 제주농업학교에서 수업 중인 사진. 홍계표는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의 제1차 항일 활동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
1938년 제주농업학교에서 수업 중인 사진. 홍계표는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의 제1차 항일 활동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

▲홍걸洪傑:?~1619(광해11), 제주목사. 1619년 12월, 목사 이괄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동년 5월, 현직에서 사망했다. 이 무렵 대정현감 성하종이 소승을 수집해 ‘선생안’을 편저했다.


▲홍경섭洪敬燮:1815(순조15)~?, 문신. 철종 때의 제주판관. 자는 낙현, 본관은 남양, 병일의 아들이다. 1846년(헌종12) 문과 식년시에서 을과로 급제했다. 1855년(철종 6) 12월, 김의표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57년 10월에 장령으로 제수를 받았다. 


1856년 오현단 앞 벽에 우암 송시열의 모사 글씨 ‘증주벽립’ 네 글자를 귤림서원 서쪽 벼랑에 본떠 새겼다. 이 글씨는 본디 서울 성균관 북쪽 벼랑에 새겨 있었던 것인데 본주 사람 변성우가 성균관 직강으로 재직 시에 본떠 온 것이다. 1857년 본주 유생 현덕문으로 하여금 ‘귤림서원지’를 수찬하게 했다. 

▲홍경옥洪卿玉:1912(일제강점기)~1949, 협재리 독서회 활동과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창립 준비위원회’의 항일활동. 본관은 남양이며 홍영종의 장남으로 한림읍 협재리<섭지> 1902번지에서 태어났다. 1934년 7월 적색노농연구회로, 이어 ‘신좌면 농업조합 준비위원회’ 등으로 조직 확대 되었다. 이 일로 62명이 구속되고서(일제는 ‘적색 농업조합 사건’이라 한다) ‘혁명적 농조 운동’으로 자리매김이 됐다. 정부에서는 1993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74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으로 16명은 목포로 이송돼 1937년 4월 12일에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재판이 종결됐다. 이때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43년 4월 경상북도 영일군 구룡포로 생활근거지를 옮겨 1949년 11월 15일 구룡포리에서 병사했다. 

▲홍경표洪景杓:1933(일제강점기)~2000, 본관 남양, 표선면 성읍리<정의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주농중 4학년을 마치고 1951년 오현고로 입학해 졸업 시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문리과에 입학한 수재다. 이듬해 일본에 있는 선친이 불러 도일, 대학을 나와 덕산산업회사 운영, 부인이 교통사고로 사별, 아들 3형제는 모두 의사로 키웠다. 


그는 제주농업중학교 4학년 재학 중에 남침으로 6·25가 발발, 학도병과 일반 전사자들의 유해가 산지 포구로 들어와 불교포교당에 임시 안치하는데 남녀 고교생이 참석하였다. 다음날 학생들이 진혼곡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제안이 나와 즉석에서 당시 제주농업중학교(6년제) 제4학년 농과 실장 김찬흡 학생이 작사를 하고 홍경표 학생이 작곡했다. 


이 진혼가는 교내에 널리 전파된 바 있다. 

 

진혼가 


①압록강 두만강아 흐를 데로 흘러서
강산에 뿌린 피를 깨끗이 씻네
백두산아 한라산아 영기를 차려
대지의 잠든 넋을 위로 하여라.
②장하다 그대 혼백 천엽만화 피어서
금수강산 위에 길이 빛나라.
백두산아!한라산아!영기를 차려 
대지의 잠든 넋을 위로 하여라.


(결언=1951년 7월 학제 개편에 의해 6년제의 제주농중은 제주일중과 제주농고로 나누어졌다. 7월 졸업식에 3학년, 4학년, 6학년이 동시에 졸업을 하게 됐다.)

1951년 7월 20일 제주농업중학교 4학년 졸업기념으로 촬영된 사진. (담임 교사 강팽주, 뒷줄 좌로부터 홍경표, 김찬흡, 김인탁)
1951년 7월 20일 제주농업중학교 4학년 졸업기념으로 촬영된 사진. (담임 교사 강팽주, 뒷줄 좌로부터 홍경표, 김찬흡, 김인탁)

▲홍계선洪繼善:생몰년 미상, 무신. 대정현감. 무과에 급제, 대정현감을 지낸 뒤에 1788년(정조12) 전라도 흥양현감에 도임하여 2년 재임한 바 있었다. 1786년(정조10) 4월, 박상춘의 후임으로 대정현에 도임하고 1787년 11월에 떠났다. 


고을을 잘 다스렸다고 해서 포상이 내려지고 또 영장으로 승진돼 전출됐다. 1787년 흉년이 들어 기민을 구제하는데 대정 사람 이환과 더불어 크게 기여했다.


▲홍계표洪季杓:1911(일제강점기)~1951,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1차 항일활동. 본관은 남양, 홍순길의 3남으로 한림읍 귀덕리<복덕-개>에서 태어나 1931년 3월 7일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들은 3월 9일 모두 체포되어 1932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2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항소했다. 졸업식을 끝나고 일어난 일이라서 졸업은 인정된 상태였으나 김원요, 양두옥, 신창진 등은 졸업장 없는 생애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폭발하여 1930년 한 해는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파급되었다. 제주도에는 제주공립농업학교의 재학생들도 어수선하더니 1931년 3월 졸업 사정회에서 졸업예정자 김원요(21, 조천)를 제적처리하고, 신창진(18, 월정)과 양두옥(18, 신창)에게 유급조치를 내렸다. 김원요·양두옥·신창진 등은 3학년이 된 후 평소 소위 일본 천황의 칙어를 학교 의식 때에 봉송을 해도 전혀 묵도하지 않아 교사들로부터 주목받던 터였다. 동년 3월 7일 졸업식 날에 김원요는 교무실에 들어가 담임인 일본교사 야마가와에게 강력히 저항하였다. 담임은 경찰에게 알리니 이를 체포하여 제주경찰서에 수감해 버렸다. 홍계표(21, 귀덕)는 교사 다카하시와 야마가와에게 학우 김원요의 수감에 대해 따질 때 이를 신호로 고태리(20, 귀덕), 양두옥, 고운석(23, 조수), 현도선(21, 하도), 김두진(20, 두모), 신찬익(20, 대림) 등은 교무실로 들어가 모든 공공기물을 던지며 또 양치삼(21, 대림) 등은 교장실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박살내었다. 이는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과 학교 당국의 황민화교육에 대한 반항심의 발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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