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개벽되자 제주의 신들은 혼돈을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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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신화(神話)의 보고 제주, 신화를 통해 보는 제주민의 정서

총명부인, 천지왕 배필 맞아 대별왕·소별왕 낳아
이승·저승 차지 경쟁 통해 인간세상 질서 확립

▲창세신화(創世神話) ‘천지왕본풀이’


 제주는 1만8000 신(神)들의 고향이자, 신들의 내력을 담은 신화가 많이 남겨져 있는 신화의 보고이다. 구비 전승되는 신화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제주의 신화는 오늘날 신들의 근본 내력을 풀어가는 이야기로 재현하고 있다. 이를 서사무가(敍事巫歌)라 하는데, 무당(심방)이 부르는 굿을 통해 신들의 근본을 풀어낸다. 살아있는 신화, 바로 ‘본풀이’이다. 


신화는 제주사람들의 소원이 실린 바람이다. 제주선인들은 신화에 바람을 실었다. 하늘과 땅과 바다가 열리는 우주의 시작을 ‘신의 영역’으로 보고, 창세를 주도한 신의 근본을 푸는 과정을 소중히 여겼다. 제주의 여러 본풀이 중에서 ‘천지왕본풀이’가 바로 그것이다. 예로부터 제주도 큰 굿의 서막이라고 볼 수 있는 초감제(初監祭) 가운데 맨 앞에 열리는 굿거리이며 신의 내력담을 풀어낸다는 점에서 신화적 성격이 강하다. ‘배포도업침’이라고도 칭하는데, 굿거리 서두에 천지조판(天地肇判) 이후 인세의 형성과 역사를 구연했던 이유는 창세를 주도한 신에 대한 제의에서 창세신(創世神)에게 올리는 축원으로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는 창세신의 근본을 푸는 신화를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음의 ‘천지왕본풀이’ 내용을 살펴보자.


‘태초에 천지는 혼돈 상태로 있었다. 하늘과 땅이 서로 맞붙어 암흑으로 휩싸여 가운데 맷돌처럼 혼합된 상태였다. 이 혼돈천지에 개벽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하늘의 머리가 자방(子方)으로 열리고, 을축년 을축월 을축일 을축시에 땅의 머리가 축방(丑方)으로 열려 하늘과 땅이 금이 생기고 점점 벌어지면서 땅에는 산이 솟아오르고, 물이 흘러내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이때 하늘에서 청(靑)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흑(黑, 혹은 물)이슬이 솟아 서로 합수돼 음양상통(陰陽相通)으로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별들이 생겨났으나 아직 암흑은 계속됐으며, 동쪽에서는 청(靑) 구름이, 서쪽에서는 백(白) 구름이, 남쪽에서는 적(赤) 구름이, 그리고 중앙에서는 황(黃) 구름이 오락가락 했다. 이때 천황닭이 목을 들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꼬리를 쳐 크게 우니 갑을동방(甲乙東方)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고, 옥황상제 천지왕이 해 둘, 달 둘을 내보내어 천지는 활짝 개벽됐다. 그러나 천지의 혼돈은 바로 잡히지 않았다. 해가 둘이어서 낮에는 백성들이 더워 죽게 마련이고, 달이 둘이어서 밤에는 추워 죽게 마련이었으며, 초목이나 새와 짐승들이 말을 하고, 귀신과 인간의 구별이 없었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1818번지에 있는 천지왕과 총명부인 석상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1818번지에 있는 천지왕과 총명부인 석상

▲신화 속에 그려진 제주민의 정서 


아직 혼란한 세상의 질서를 신화에서는 어떻게 바로 잡았을까. 그 해결책을 천지왕 혼자만이 아닌, 부인인 총명부인과 함께, 그리고 대별왕과 소별왕이라는 자식 세대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천지왕은 좋은 꿈을 꾼 후 지상으로 내려가 총명부인을 배필로 맞고자 했다. 총명부인은 자신을 찾아온 천지왕을 대접할 생각으로 부자인 수명장자의 집에 가서 쌀을 빌려 왔다. 하지만 마음씨 고약한 수명장자는 쌀에 모래를 섞어 주었다. 첫술에 돌을 씹은 천지왕은 수명장자와 그 아들·딸들의 악행을 전해 듣고 벼락장군 벼락사자, 우뢰장군 우뢰사자, 화덕진군 등을 대동하여 그의 집안을 일순간에 몰살시킨다. 며칠간의 동침 후에 천지왕이 하늘로 올라가려 하자 총명부인이 자식을 낳으면 어찌할지를 물었다. 이에 천지왕이 아들을 낳거든 이름을 대별왕·소별왕이라 짓고, 딸을 낳거든 대월왕·소월왕이라 지으라고 했다. 그리고 박씨 세 개를 내주며 자식들이 자신을 찾거든 이를 심어 하늘로 뻗쳐 올라간 줄을 타고 올라올 수 있도록 당부도 남겼다.


천지왕이 하늘로 올라간 후 총명부인이 아들 형제를 낳아 이름을 대별왕과 소별왕이라고 지었다. 형제는 자라나서 아버지를 만나고자 박씨를 심었다. 박씨에서 줄기가 돋아 덩굴이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이에 형제는 그 덩굴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 천지왕을 만났다. 천지왕은 형인 대별왕에게 이승, 아우인 소별왕에게 저승을 각각 차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별왕은 욕심이 많아 이승을 차지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형에게 서로 경쟁해 이기는 자가 이승을 차지하자는 내기를 청했다. 동생은 먼저 수수께끼로 다투었으나 이기지 못하자 한 번 더 하자고 졸라서 서천꽃밭에 꽃을 심어 더 번성하게 한 이가 이승을 차지하자는 내기를 했다. 꽃을 가꾸는 데 있어 대별왕의 꽃은 번성했지만 소별왕의 꽃은 번성하지 못했다. 이에 소별왕이 대별왕에게 잠을 자자고 하고는 대별왕이 잠든 사이에 몰래 대별왕의 꽃을 자기 앞에 가져다 놓고 자신의 꽃을 대별왕 앞에 가져다 놓았다. 잠에서 깬 대별왕은 꽃이 바뀐 것을 알았으나 소별왕에게 이승을 차지하도록 하고 자신은 저승으로 갔다.


소별왕이 이승에 와서 보니 해도 두 개가 뜨고 달도 두 개가 뜨고, 초목이나 짐승도 말을 하고, 인간 세상에는 악행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부르면 귀신이 대답하고 귀신을 부르면 사람이 대답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소별왕은 형에게 이 혼란을 바로잡아 주도록 부탁했다. 대별왕은 천 근 활과 백 근 살을 가지고 해와 달 하나씩을 쏘아 바다에 던져 하나씩만 남기고, 송피가루 닷 말 닷 되를 뿌려서 짐승들과 초목이 말을 못하게 하였다. 또한 귀신과 인간은 저울질을 하여 백 근이 넘는 것은 인간, 못한 것은 귀신으로 각각 보내어 인간과 귀신을 구별하도록 했다. 이로써 혼란스러웠던 인간세상의 질서가 정리가 되어 태평하게 됐다.’


위 내용은 인간 세상의 질서 정리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천지왕과 총명부인, 그리고 두 아들인 대별왕·소별왕이 행한 부분으로 나눠진다. 천지왕은 총명부인과 결연을 맺기 위해 내려온 후, 수명장자의 악행을 다스리며 인간세상의 질서를 확립해나간다. 이는 아들 형제가 이루어낼 인간세상의 확립을 위한 전제조건임을 알 수 있다. 두 아들인 대별왕과 소별왕은 인간세상의 질서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승과 저승을 차지하기 위한 시합과 경쟁을 해나간다. 이는 신이지만 창세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자격조건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 주며, 이러한 삶의 조건이 절대적인 신에 의한 질서 확립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절대신 하나의 창세 구도가 아닌, 신의 영역이지만 천지왕·총명부인·대별왕·소별왕 등의 가족 구성원의 조화를 통해 인간세상의 질서 확립 또한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중시하는 우리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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