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이왓 사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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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어머니가 두 분이다. 낳아준 어머니와 큰어머니. 큰어머니는 4·3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첫 부인이다.

1948년 11월 15일 군인들은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을 포위했고 불을 질렀다. 오순도순 모여 살던 정든 집도 소와 말도, 모든 게 불타 없어졌다. 동네 사람들은 숨었다. 큰어머니도 동네 사람들과 ‘무등이왓’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앞내(乾川: 건천) 근처에 숨었다. 군인들은 열흘 만인 11월 25일쯤 큰어머니와 주민들을 찾아냈고 그 자리에서 모두 총살했다.

당시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1947년 8월 8일 동광마을에서 발생한 ‘공출반대’사건으로 다섯 명의 마을사람들과 함께 재판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이다.

1947년 여름, 동광마을 ‘무등이왓’ 보리농사는 흉년으로 소출이 적었음에도 미군정은 파종 면적단위로 공출량을 할당했다. 먹을 곡식도 부족한데 공출하라는 행정당국의 명령에 마을사람들은 난감했다. 사람들 입에서는 “미군정이 일제 때보다 못하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행정당국은 공출을 독려했다. 남제주군청과 안덕면 직원들이 동광마을 이장 집에 묵으면서 공출 독려에 나섰다.

주민들은 이장 집을 찾아가 공무원들에게 할당량을 줄여 달라고 간청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폭력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공무원들이 주민들에게 폭행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는 광주형무소에 갇혔던 것이다.

아버지가 만기출옥해 고향 ‘무등이왓’으로 돌아왔을 때는 살던 집도 큰어머니도 없었다. 아버지는 화전으로 일군 얼마 되지 않은 땅에 농사지었지만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어 남의 집 일꾼으로 나섰다. 보리 베고 홀치기(타작)하고,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 동네에 일감이 없어 화순, 사계마을로 심지어 가파도까지 가서 일했다.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형무소 출옥 5년 만에 새 각시를 얻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딸, 아들, 딸 삼남매를 낳았지만 아버지는 왠일인지 새 각시인 어머니를 호적(제적)에 올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낳은 삼 남매는 큰어머니 호적에 올라있다.

어머니 나이 93세.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고령이다. 어머니는 아버지 각시로 평생을 살았지만 아버지 호적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늦고 늦었지만 호적에 올리려 한다. 아버지의 각시로, 아버지의 부인으로, 삼남매의 어머니로 호적에 올리려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4·3당시 사망·행방불명된 희생자와 사실혼 관계인 사람의 사후 혼인신고 효력과 사후 양자에 대한 입양신고 효력을 인정하는 특례가 마련됐다는 보도를 접했다.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4·3 그 시절, 공출을 반대했다고 감옥에 가고, 출옥 후 불타버린 집터와 갈아 먹을 땅도 없는 아버지와 만나 삼 남매를 낳고 기른 어머니, 지금껏 호적에 올리지 못한 자책으로 하루하루 보내는 늙은 아들. 어머니를 호적에 올릴 날은 언제인지….

그 날을 기다리며 산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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