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상 치를 때마다 다랑쉬오름서 분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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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효자 홍달한

홍관천, 교포사업가
일본에서 청년회 회장

홍규, 제주목사 역임
흉년 때 곡식 분급해

홍달한, 성산 출신 효자
충효로서 정려 내려져

홍달훈, 애월 출신 문신
청암찰방·창락찰방 역임

홍두표, 독립운동 맹세
日 명문대 재학 중 병사
다랑쉬오름 전경.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홍달한은 다랑쉬오름에 올라가 수평선 너머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애곡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정에서 그를 충효의 이름으로 정려했다.
다랑쉬오름 전경.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홍달한은 다랑쉬오름에 올라가 수평선 너머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애곡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정에서 그를 충효의 이름으로 정려했다.

▲홍관천洪寬千:1910(일제강점기)~1949, 교포사업가, 본관 남양, 문정공파, 애월읍 고내리에서 홍계학의 4남으로 태어나, ‘재일본 고내리청년회’로 확대 개편하여 초대 회장에 홍관천을 추대하였다. 조국이 해방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조직의 확대 개편에 공감되어 청년회를 해산, 청소년과 장년 모두 어울리는 모임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다시 ‘고내리 친목회’로 출발, 초대 회장에 고현모를 추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사단법인 당성사적보존회 도쿄지부장이 되어 만년에 활동했다. 실은 고내<고내-망> 사람으로 1917년 오두만이 처음 도일, 이어 1927년에 애월교 1회 졸업생 3명(고원형·장창기·홍관천)의 주도로 고영봉, 홍달윤, 장슬호, 문석찬, 전태진 등과 함께 ‘고내리 소년공창회’를 조직, 전태진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 후일 회원이 모두 20세를 넘어 청년이 되자 1930년에 소년공창회를 해산, 오래 사업에 힘쓰다가 도쿄 북구 영정 24-13-205에서 병몰, 이후 고내리 도쿄친목회원들은 증가되어 모두 이재에 밝아 제주출신의 모범을 보였다.


▲홍규洪圭:생몰년 미상, 무신. 제주목사. 1884년(고종21) 12월에 심현택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86년 5월에 떠나자 공적비가 세워졌다. 


감은당을 별도로 설치, 이에 앞서 문무관의 청사를 교동에 합설하여 편액을 ‘연계’라고 하였다. 후일 이를 폐지하여 문관은 향교에, 무관은 장청에 우거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설청한 것이다. 1884년(고종21) 연희각을 중수, 이 각은 언제 건축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아동헌이라고 불리어 왔다. 그의 이름을 새긴 마애명이 방선문에 남아 있다. 또 1885년 가을에 대풍으로 흉년이 들어 육지 곡식을 운반해 분급하였다. 제주향교에 ‘사상홍공규대사비’가 1886년(고종23) 5월에 세워졌다. 또 현재 화북동 비석거리에는 ‘목사 홍공규거사비’가 있으며 1887년(고종24) 4월에 세운 것이다. 또 본주인 효자 김치화의 가문에 정표, 김치화의 아들 김기호도 효행으로 알려졌다.

수산1리 효자문거리 인근에 있는 충효 홍달한 정려비. (제주일보 자료사진)
수산1리 효자문거리 인근에 있는 충효 홍달한 정려비. (제주일보 자료사진)

▲홍달한洪達漢:생몰년 미상, 효자. 본관은 남양, 정의현 고성리 <동유암>에서 태어났다. 부친을 여의고 모친에게 효도를 했을 뿐만 아니라 모친이 죽자 여묘하고, 부친상을 못 본 데 대해 3년 상을 추복하였다. 


또 1720년(숙종46) 숙종이 승하한 때와 1724년(경종4) 경종이 승하하여 국상을 치를 때마다 삭망에 ‘대랑수-봉(다랑쉬 오름)’높은 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분향, 북방재배. 제주목사 한억증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자 그에게 가자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1744년(영조20) 제주목사 김윤이 그의 충효에 대한 행장을 조정에 알리니 정려가 내려졌다. 영조 때의 판서 정실은 ‘홍효자전’을 지어 그를 널리 알렸다.


▲홍달훈洪達勛:1756(영조32)~1837(헌종3), 문신. 사부에 능한 문사. 자는 대년, 호는 우포, 본관은 남양, 애월읍 수산리<물-미>에서 홍수택의 3남 6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1794년(정조18) 제주순무어사 심낙수가 내도하여 과거 시험장을 설치, 문과에 7명과 무과에 10명을 시취할 때 ‘승치삼천(좋은 말:3000마리)’이란 부제에서 발군의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1795년 3월 13일 친임춘당대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 이때 전시방의 부제는 ‘근상천천세수(謹上千千歲壽:삼가 천년수를 올립니다)’였다. 


이때에 문과 초시에서, 논에는 변경붕<신도:뒌-개>, 책에는 부종인<토평:돚-드르>, 시에는 고명학<상효:웃-쇠둔>, 명에는 이태상<수산:서-물미>, 송에는 정태언<상도:도려> 각기 수석으로 급제하고, 특별히 책에서 김명헌<중문>이 차석이었으나 급제시켰다. 이 과거시험 시권을 보내니 임금의 친임아래에 과차하니 제주사람으로서 병과 25인망에 이태상(제주목), 또 병과 25인망에 변경붕(대정), 또 33인망에 고명학(정의), 또 38인망에 부종인(정의) 등이 동시에 급제하였다. 홍달훈의 벼슬은 사헌부장령·병조좌랑을 거쳐 외직으로 전라도 장성군의 청암찰방·경상도 풍기군의 창락찰방을 역임하였다.


▲홍두표洪斗杓:1891(광무5)~1917, 지사. 호는 매원. 본관은 남양,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1914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메이지대학에 입학, 3학년 때 폐결핵에 걸려 허로증으로 도쿄에서 병사하였다. 


그가 19세 때에 나라 빼앗기는 것을 목도, 동향의 동지 송산 김명식, 죽암 고순흠 등 3인은 학력을 쌓은 후 조국의 독립 운동에 몸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이들은 ‘천지위세 일월위증(天地爲誓日月爲證: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니 저 해와 달은 증명하리라)’라고 혈서를 써서 ‘송매죽’과 같이 절개를 끝까지 지키기로 하늘에 맹세했다. 


송산은 일본의 와세다대학을, 죽암은 경성전수학교(서울법대 전신)를, 매원은 메이지대학으로 진학한 것이다. 송산과 죽암은 학업을 마치고 평생 지조를 지켜 항일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매원만은 애석히 27세에 죽으니 동향의 선배 김시학과 김형식과 성안의 문인 김석익은 만시를 지어 그의 재주를 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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