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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도평초등학교 교장·수필가

교단에서 제자와 함께 일한다는 건 축복이고 무한한 행운의 시작이다.

올해로 교단 43년째, 수많은 시간 속 교단에서 제자와 함께 근무하는, 마치 하늘에서 내린 선물과 같은 특별한 행운의 순간이 내게도 찾아왔다. 교육계획 수립주간에 새로 부임해 오시는 선생님들과 교장실에서 첫 상견례를 하는데, 어느 여교사가 20여 년 전 N초등학교 5학년 제자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교원 전보 발표가 끝나자 업무 편성 때문에 전입 해오시는 선생님들께 일일이 전화했었는데, 그중에 특별히 각인된 또렷하고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내 제자였다. “아니, 선생님이 그 제자라고?” 몇 번이나 내 귀를 의심하고 눈을 씻고 마주한 순간, 운명적인 인연은 끌리는 것인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첫 목소리부터가 남다름을 느끼긴 했지만 당당하게 대한민국의 빛나는 교사로 성장해 내 앞에 서 있다.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예상치 못한 제자와의 만남에 순간 반갑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퇴근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책장 구석에 꽂혀있는 3권의 교단 일지를 들춰보았다. 내 인생의 보물, 40대 한창 시절 젊음의 노트다. 시간을 거슬러 20여 년 전 그곳으로 달려간다. 5학년 3반 교실에 가만히 있던 기억은 스멀스멀 내 마음을 전율케 한다. 폐곡선으로 서로 얽힌 교우 관계 벤다이어그램, 모둠에서 만든 반가, 관찰 상담, 학습 평가 기록 등등 쓰디쓴 커피를 마셔도, 온밤을 지새워도 채워지지 않은 나의 독백 같은 희로애락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기억조차 희미한 아이들의 이름을 명렬표 순서대로 한 명씩 나지막이 불러본다. 어디선가 이 사회의 중추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겠구나. 담임을 하며 지나간 교실들이 이제 더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 속에 담긴 추억과 열정은 더욱 푸르게 내 마음속에 피어난다. 그곳은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특별한 공간이자 성장과 변화를 기억하는 소중한 장소로 추억한다. 기억의 잔향은 강렬했다. 어린 날의 그는 애절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곤 했지만, 이젠 자신감 넘치는 교사로 거듭나 있다. 자그마했던 그의 손에는 지혜로운 교사의 손길이 있고, 어릴 적의 짧았던 발걸음은 자신만의 큼직한 발자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들은 더 높이 날아오르기 위한 날갯짓이자 꿈을 향한 여정의 시작점, 미래로 이끄는 열쇠가 돼 줄 것이다.

다시 설레는 신학기가 시작됐다. 향기롭고 따뜻해서 봄이 온 줄 알았는데 아이들이 찾아와 생동감 넘친다. 제자들로부터 받는 사랑과 관심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선한 모습과 열정은 서로에게 에너지를 줄 것이다. 짧은 손 편지와 두꺼운 노트 한 권을 선물로 준비했다. ‘나의 자그마했던 제자여, 너의 끈기와 열정, 끊임없는 노력을 칭찬하고, 네가 가는 길에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하다. 항상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어느덧 나의 교단도 마지막, 빈 공간엔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잡으려면 사라지는 무지개가 아닌, 별 헤는 맘으로 아이들과의 소소한 이야기를 끝까지 써 내려가련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오늘도 우리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함께 가고 있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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