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굿과 제의(祭儀), 포제(酺祭)로 무사안녕 기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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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신화(神話)의 보고 제주, 신화를 통해 보는 제주민의 정서

조선시대 제주, 유교·불교 혼재된 사회
제사 지낼 때 말·꿩 소리 들리면 길조
제주시 영평상동마을회(회장 김용범)가 지난 2월 13일 영평가시나물 기령각제단에서 마을 주민들과 지역에 입주한 기업체들의 무사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을포제(초헌관 강창석)를 봉행하고 있다.
제주시 영평상동마을회(회장 김용범)가 지난 2월 13일 영평가시나물 기령각제단에서 마을 주민들과 지역에 입주한 기업체들의 무사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을포제(초헌관 강창석)를 봉행하고 있다.

▲절오백 당오백 무격신앙


개벽신화와 개국신화, 여기에 더하여 무격신화를 담은 제주는, 신화의 나라·신화의 보고이다. 조선시대 제주는 무속신앙를 중심으로 해 유교와 불교가 혼재된 사회였다. 무속신앙으로 치러지는 당굿은 오랜 기간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주선인들의 제천행사이며 마을축제이다. 음력 정월에는 마을 수호신에게 인사를 드리는 신과세제, 음력 2월에는 영등신을 모시는 영등제, 한여름에는 우마의 번성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백중제(마불림제), 9·10월에는 1년 농사의 고마움을 표시하는 시만국대제(또는 新萬穀大祭),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칠성제, 바다 수호신에게 비는 용왕제, 산신제, 풀무고사제 등 다양한 형태의 굿과 제의가 행해졌다. 조선후기 유교정책이 펼쳐지면서 19세기 전후해 유교식 제사인 포제가 남성 중심으로 행해지고, 이때부터 마을제가 여성 중심의 당굿과 남성 중심의 포제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남녀가 함께 어우러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가 그대로 유지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마을이 와흘리다. 


고려시대의 절인 수정사·법화사·원당사와 같은 큰 사찰들은 조선중기 불교사찰로 존속되었지만, 그 모습을 유지한 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사원은 없다. 조선의 억불숭유정책이 제주에서만 행해진 것은 아닌데도 육지에 비해 불교사찰에 대한 흔적을 제주에서 찾기가 힘들다. 무속신앙의 뿌리가 육지보다 깊고, 불교 역시 무속화와 세속화의 현상과 어우러진 데서 그 연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제주의 불교는 애초 무속신앙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퍼져갔을 것이다. 국가종교로서 장려됐던 고려의 불교가 제주에서도 유지 발전했으나, 조선시대에서는 억불정책이 실시되면서 제주불교는 뿌리가 깊은 무속신앙과 서로 영향을 끼치며 유지됐던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초 이형상 목사는 한라산신제를 국가제사로 건의하여 제의로 치렀다. 그는 제주의 신당과 불교사찰을 130여 곳이나 파괴했던 지방관이었음에도, 토속신앙의 상징인 한라산신제를 유교국가의 제사로 모신 이유가 궁금하다. 토속신앙의 뿌리가 깊었던 제주사회를 끌어안지 않고서는 제주선인들을 다스릴 수 없다는 조선정부의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제주에서 실시된 국가제사로는 사직대제, 석전제, 성황발고제, 여제, 독제, 풍운뇌우제, 한라산신제 등 7종류이다. 이러한 국가제사는 19세기에 와서 정립돼 정기적으로 실시됐다. 그 중 한라산산신제, 성황발고제, 여제, 그리고 풍운뇌우제가 제주의 토속신앙인 국가제사로 모셔졌다. 성황발고제란 제주민의 수호신인 성황신에게 지냈던 제사로, 제주민의 신앙 대상인 뱀신이 성황신으로 모셔 지내는 제사이다. 여제(厲祭)란 돌아가 쉴 곳이 없는 귀신인 여귀를 달래는 제사이다. 성황신이 여귀를 불러 모으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난 사흘 후 제사를 지냈다. 풍운뇌우제는 바람, 구름, 비의 신들에게 올리는 제사로 탐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전한다.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의 금산공원 내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납읍리마을제 포제단.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의 금산공원 내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납읍리마을제 포제단.

▲마을의 안녕·풍년·화합을 기원하는 포제


제주에는 민간신앙으로 남성들이 주관하는 유교식 제의인 포제와, 심방이 주도하는 무속식 제의인 당굿이 있다. 애초 당굿은 남녀 모두 하나가 돼 풍요를 기원하던 공동의 축제였다. 조선중기 이후 유교제법(儒敎祭法)이 보급됨에 따라 남성들이 당굿에 참여하지 않고 별도로 포제를 지내온다. 포제(酺祭)란 정월과 유월에 지내는 동제로, 이삿제, 거릿제, 천제, 산천제, 마을제, 포신제 등으로 불린다. 마을사람들의 불상사를 예방하고 오곡의 풍성을 기원하고, 농사의 풍년과 축산의 번성, 바다에서의 풍어, 자손의 창성을 위해 포제단을 차려 치성을 드린다. 본향당제가 낮에 지내는 것에 반해 포제는 고요한 한밤중에 제를 지내는 고사와도 같은 제의라고 할 수 있다. 포제단은 사람과 사물에게 재해를 주는 포신에게 액을 막고 복을 줄 것을 빌던 제단이다. 


서울과 제주도 두 곳에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제단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마보단(馬步壇)에서 지냈다 한다. 1768년(영조 44년) 조정에서는 호남지방에 충재(蟲災)가 들어서 포제를 지낼 것을 명했다.


 그러나 충재가 들었음에도 포제를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백을 문책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포신(酺神)은 재해를 내리는 신이므로, 포신에게 재해를 내리지 말기를 바라는 제의가 바로 포제의 원래 취지이기도 하다. 여러 마을에서 불려지는 ‘포젯동산’이란 지명에서 보듯, 원래 해신제와 포신제를 함께 지내기 위해 마을에서는 높은 곳에 제단을 마련했을 것이다. 이후 많은 마을에서 포제단을 갯가로 옮겨 제의를 지금껏 올리고 있음이다. 산신제·동포제·갯포제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포제의 대상 신위는 천신․포신․해신 등이다. 3신위 중 천신은 마을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이고, 포신은 농작물을, 해신은 바다를 관장하는 신이다. 포제는 농업과 어업에서의 풍요와 풍어와 함께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염원하는 제의이다. 이는 조선시대 이후 마을 설촌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매해 설 지나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해 자시(子時)에 지낸다. 제사를 지낼 때 길흉을 예측하는 징조들이 있는데, 말이나 꿩의 소리가 들리면 길조라 여기고, 개·소·닭 소리가 들리면 흉조라 여겼다 한다. 유교식 마을 자치적 의례인 포제는, 마을의 풍요를 빌고 집안마다 무사안녕 하기를 기원하는 제의에서 보듯, 당 신앙의 변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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