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철의 색다른 제주여행] 누군가에게는 강렬한 아름다움 혹은 유년시절의 아픈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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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올레길에서 만나는 동백꽃

5코스 남원 위미리·3코스 성산 삼달리서 만나는 꽃밭 
동백, 정치권·다양한 예술 작품서 제주 4·3사건 소재
해질녘 ‘삼달리 꽃밭에서’ 정원의 모습. ‘삼달리 꽃밭에서’를 조성한 현용행 전 성산일출봉농협 조합장은 “제주사람들이나 외지 여행객들이 편안히 쉬었다 갈 수 있는 힐링 플레이스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해질녘 ‘삼달리 꽃밭에서’ 정원의 모습. ‘삼달리 꽃밭에서’를 조성한 현용행 전 성산일출봉농협 조합장은 “제주사람들이나 외지 여행객들이 편안히 쉬었다 갈 수 있는 힐링 플레이스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김유정의 ‘동백꽃’은 1930년대 단편소설이다. 강원도 산골을 배경으로 사춘기 소년·소녀의 풋풋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연모의 정으로 가득한 소녀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소년이 답답한 나머지 억지로 자빠트리며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리는 마지막 장면이 클라이맥스다. 숙맥 같은 소년이 소녀에게 안겨 넘어지면서 ‘향긋한 그 냄새에 땅이 꺼지는 듯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고 느끼는 구절은 독자들을 배시시 웃음짓게 만든다.


교과서에도 실린 우리 문학 속 이런 정겨운 이미지와는 달리 동백꽃이란 이름에선 어쩐지 처연한 슬픔이나 애환이 느껴진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이미자 씨의 ‘동백아가씨’ 노랫말은 한 세대 전을 살았던 우리네 부모님들의 심금을 많이도 울렸다.


‘동백(冬柏)’은 이름 그대로 추운 겨울의 나무다. 따뜻한 남도에서 꽃 피우는 겨울나무다. 눈 오는 겨울의 제주는 바람 또한 거세다. 봄 여름 가을 조금씩 다른 이유로 넘쳐나던 관광객들은 겨울이 되면 발길이 뜸해진다. 봄철 유채꽃 한창일 때 제주를 찾는 이들이 많지만, 동백꽃을 만나러 한겨울에 제주를 찾는 이들도 점차 늘고 있다. 외지인 여행자들을 끌어들이는 제주 동백꽃의 매력이라면 선홍빛 색깔이 주는 ‘강렬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5코스 전경.
5코스 전경.

겨울철 올레길을 걷는 여행자들이 동백꽃을 처음 만나는 건 5코스 시작점을 5㎞ 지나온 위미리에서다. 남원포구에서 쇠소깍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걷다가 위미리 내륙 쪽으로 일이십 분 올라가다 보면 ‘위미동백나무군락지’가 나타난다. 


열일곱 살에 이 마을로 시집온 현맹춘 할머니가 ‘해초를 캐고, 품팔이를 하며 평생 돈을 모아 어렵게 황무지를 샀고, 모진 바람을 막고자 한라산의 동백 씨앗을 따다가 이곳에 뿌렸다’고 한다. 할머니의 집념과 정성이 100여 년 전 황무지였던 이곳을 지금처럼 울창한 동백나무 숲으로 만든 것이다.


올레길 걷는 이들이 제주 동백꽃과 처음 만나는 곳이 올겨울부터는 5코스 남원 위미리가 아니라 3코스 성산 삼달리로 앞당겨질 듯하다. 새로운 동백꽃 정원이 ‘삼달리 꽃밭에서’란 브랜드로 개장되기 때문이다. 올레 3-A코스를 걷다가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을 지나 신흥포구로 내려서기 직전 왼편으로 200m만 올레 코스를 벗어나면 만난다.


JTBC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 영향으로 ‘삼달리’는 요즘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는듯하다. 그래서인지 지난 겨울 제주를 찾은 여행자들이 남긴 SNS 후기에는 아직 개장도 안 된 이곳이 ‘삼달리 동백꽃밭’이란 주제로 유독 많이 올라와 있다. 


‘우리 제주분들이나 외지인 여행자들이 편안히 쉬었다 갈 수 있는 힐링 플레이스가 되었으면 합니다. 1만5000 평 부지에 겨울철 동백꽃 이외에도 사계절 다양한 꽃들이 만발할 것입니다. ‘아침고요수목원’ 같은 민간 정원 명소가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이곳을 조성하는 현용행 전 성산일출봉농협 조합장의 말이다.


제주 동백꽃은 한겨울을 지나 이른 봄까지도 여전히 아름답게 피어 있다. 만개했던 꽃들은 봄이 깊어가면서 하나씩 둘씩 후드득후드득 땅으로 떨어진다. 육지에서 온 여행객들에겐 그 꽃나무의 낙화까지도 아름답다.


지긋한 연세의 제주 어르신들에겐 동백나무의 낙화가 다른 의미로 각인되어 있기도 하다. 가끔씩은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유년의 기억이 되살아나 몸을 떨기도 한다. 제주 출신 현기영 작가의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의 한 대목을 보자. 


‘겨울철 그 고장에 관광갔던 사람들은 눈 속에 피는 붉은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눈 위에 무더기로 떨어져 뒹구는 붉은 낙화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름답게 보는 것이 정상이다. 나도 더 어렸을 때는 떨어진 그 통꽃에 입을 대고 꽃물을 빨며 즐거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악한 시절 이후 내 정서는 왜곡되어 그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눈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끔찍하게 느껴진다. 아니, 꽃잎 한 장씩 나붓나붓 떨어지지 않고 무거운 통꽃으로 툭툭 떨어지는 그 잔인한 낙화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목 잘린 채 땅에 뒹굴던 그 시절의 머리통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현 작가는 이 자전적 소설에서 어린 시절 겪었던 4·3사건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땅에 떨어져 흩어진 붉은 동백꽃들이 ‘눈 위에 뿌려진 선혈’이나 ‘목 잘린 채 땅에 뒹굴던 머리통들’로 보여졌던 것이다.


강요배 화가의 ‘동백꽃 지다’는 4·3사건의 전 과정을 연작 그림으로 보여주는 화집의 제목이다. 슬프고 처참했던 당시의 상황들이 섬세하면서 거친 필치로 생생하게 재현된다. 동백꽃은 제주 4·3의 상징이 됐다. 재작년 4월 3일 제주를 찾은 윤석열 대통령의 가슴에도 동백꽃 배지가 달려 있었다.


꽃 피는 제철에 가면 사람 키 두세 배 높이의 동백나무들이 두터운 갑옷을 걸친 듯 온통 선홍빛 붉은 꽃들로 감싸여 있다. 여행 동안에는 그저 겨울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면 될 터이고, 구태여 4·3을 떠올릴 필요는 없겠다. 단지, 나중에 언젠가 지난 여행을 추억할 때에 붉은 꽃의 아름다움에 깃든 아픈 역사의 일까지도 함께 떠올린다면 여행의 의미는 더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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