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신앙 성지, 130년 믿음이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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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주 전동성당

1891년 보두네 신부 미사 시작…1931년 건물 완성
로마네스크·비잔틴 양식으로 곡선미가 아름다워 
전주 전동성당 전경. 왼쪽에는 전동성당의 사제단이 있다. 성당 정면 아치에 벽돌로 장식한 부분을 아키볼트라 한다. 정면 중앙에는 높이 솟아 있는 고탑과 좌우 계단탑이 있는데, 고탑 밑에는 종탑이 있고, 종탑 밑에는 미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장미창이 있다.
전주 전동성당 전경. 왼쪽에는 전동성당의 사제단이 있다. 성당 정면 아치에 벽돌로 장식한 부분을 아키볼트라 한다. 정면 중앙에는 높이 솟아 있는 고탑과 좌우 계단탑이 있는데, 고탑 밑에는 종탑이 있고, 종탑 밑에는 미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장미창이 있다.

지난 한해 1500만명의 관광객이 몰리고 최근 총선을 앞두고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와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찾으면서 전국적으로 더욱 유명해진 전주 한옥마을은 전주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전주에는 이보다 먼저 전주를 대표하는 명소로 불리던 전동성당이 있다.


전동성당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첫 순교터라는 아픔도 간직하고 있지만 로마네스크 양식에 비잔틴 양식이 녹아 한국의 종교 건축물 중 곡선미가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며 화려한 건물로 손꼽힌다.


지난 주말 종교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적 차원에서도 매우 귀중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는 전주 전동성당을 찾았다.

전동성당 내부. 붉은 벽돌 띠가 제대의 뒷벽을 포함해 모든 곳을 감싸고 있으며 내부의 수직성과 수평성을 균형있게 잡아주고 있다.
전동성당 내부. 붉은 벽돌 띠가 제대의 뒷벽을 포함해 모든 곳을 감싸고 있으며 내부의 수직성과 수평성을 균형있게 잡아주고 있다.

▲130여 년 역사 간직


전동성당이 건립되기 이전인 1891년부터 보두네 신부가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민가를 사들여 임시 본당(전주본당)으로 삼아 미사를 시작했다. 보두네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84년 사제서품을 받고 프랑스를 떠나 1885년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충청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한국의 풍습과 언어를 익힌 뒤, 1889년 봄 전주본당(현재 전동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다.


그러나 당시 전주는 개항지가 아니었고, 전주감영이 위치하고 있어 보두네 신부는 전주에 곧바로 들어올 수 없었기에, 전주 근교인 대성리에 머물면서 전교 사업을 시작했다. 보두네 신부는 교우들의 성당 신축기금과 자신이 절약해 모은 돈으로, 한국 첫 순교자 윤지충(바오로)와 권상연(야고보)의 순교 정신을 기려, 그들이 순교했던 순교터를 매입해 본당의 터전을 마련했다. 전주에 신작로가 생기며 풍남문 성벽을 헐자, 전주부의 허가를 얻어 이 성벽의 돌과 흙을 사용해 그 돌로는 성당의 주춧돌을, 그 흙으로는 인부 100여 명이 직접 벽돌을 구워서 건물을 올렸다. 


본당이 처음 생겼을 때에 전주읍성 주변에 신자는 거의 없었고, 주로 산골인 대승리, 고산 되재, 천호동, 배재 등지에 신자가 밀집해 있었다. 그러나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는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나며 신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기존의 성당보다 더 큰 성당의 필요해졌다. 이후 1908년 명동성당의 내부를 건축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성당이 착공됐다. 성당은 1914년에 비로소 외관 공사가 끝났으며, 이후로도 계속 공사가 진행돼 1931년에 완공됐고, 그 해 6월 대구대목구의 드망즈 교구장을 주례로 축성식을 가졌다.


공사 기간 동안 전주시내 신자들은 물론 진안, 장성 등지의 교우들이 밥을 지어먹을 솥과 양식을 짊어지고 와, 손에는 굳은살이, 어깨에는 혹이 생기도록 자원 부역을 했다. 그러한 노력 끝에 공사를 시작한 지 7년 만인 1914년 외부공사를 마쳤다. 그런데 이듬해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는 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56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그 뒤를 이어 받은 제2대 본당 주임인 라크루 신부의 주도로, 1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내부공사를 진행해 마침내 1931년, 착공한 지 23년 만에 성당을 완성한다. 그리고 전동성당은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88호로 지정됐다. 함께 있는 전동성당 사제관은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됐다.

전동성당 사제관 전경. 전동성당 사제관은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됐다.
전동성당 사제관 전경. 전동성당 사제관은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됐다.

▲호남 최초 서양식 건물의 건축양식 


전동성당의 성전은 호남 지방에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건물로 종교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적 차원에서도 매우 귀중한 유산으로 인정받는다.


먼저 성당 정면 아치를 보면, 벽돌로 장식한 부분이 보이는데, 이것을 아키볼트(장식 창도리)라 한다. 정면 중앙에는 높이 솟아 있는 고탑과 좌우 계단탑이 있는데, 고탑 밑에는 종탑이 있고, 종탑 밑에는 미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장미창이 있다.


보통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성당을 받치던 아치가 바닥까지 내려오거나 기둥머리까지 내려오는데, 전동성당의 아치는 채광창이 있는 벽에서 멈추고 색깔을 바꿔 붉은 벽돌로 기둥머리까지 오도록 하여, 전반적인 따뜻함과 포근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내부를 보면, 붉은 벽돌 띠가 제대의 뒷벽을 포함해 모든 곳을 감싸고 있는데, 이 역시 내부 공간 전체에 따뜻함을 주면서 동시에 내부의 수직성과 수평성을 균형있게 잡아주고 있다. 참으로 탁월한 조형이며 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하여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주춧돌인 화강암은 착공 당시인 1908년에 대한제국을 간접 통치하고 있던 일본 제국 통감부가 헐은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 돌을 이용했다. 성당을 구성하는 벽돌의 일부도 헐린 성벽에서 나온 흙을 구워 만들었다. 나머지 석재와 목재들은 각각 익산시 황등면의 채석장과 승암산의 목재를 사용했다.

전동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해 붉은 벽돌로 지어졌으며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 사적 제 288호로 지정됐다.
전동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해 붉은 벽돌로 지어졌으며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 사적 제 288호로 지정됐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첫 순교터


전동성당은 한국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첫 순교자들인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터 위에 세워진 성당으로, 대한민국 순교의 역사적인 기념터이자 뿌리 깊은 신앙의 성지다.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은 지체 높은 양반가의 자제들로,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된 후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자신들이 찾고자 했던 진리에 대한 해답을 얻고, 3년 뒤 윤지충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권상연은 그로부터 천주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러던중 1790년경 북경의 구베아 주교로부터 제사 금지령이 전달됐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조선의 양반들이 충격을 받고 신앙을 버리게 되지만, 윤지충과 권상연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교식 예를 쓰지 않고 신주를 불살라 버렸는데 이 소식이 조정까지 전해진다. 


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에 피신해 있던 그들을 대신해 숙부를 감금하자, 이들은 진산 관아에 자수했고, 전라감영에 압송되어 온갖 문초와 배교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천주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말로 자신들의 믿음을 당당히 드러냈다. 시대와 배경을 고려해 볼 때 이는 놀라운 신앙 고백이자 선언이었고, 이에 그들에게는 군문효수형이 언도됐다. 그렇게 순교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한 윤지충의 나이는 33세, 권상연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렇게 1791년 한국 교회의 최초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현장, 또 1801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의 능지처참과 참수의 현장 위에, 성인들의 순교를 지켜본 성곽의 돌로 전동성당이 지어짐으로써 이곳이 순교지일뿐 아니라 ‘신앙의 증거’, ‘신앙의 요람’임을 드러냈다.  

전동성당 측면. 붉은 벽돌이 기둥머리까지 오도록 해, 전반적인 따뜻함과 포근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전동성당 측면. 붉은 벽돌이 기둥머리까지 오도록 해, 전반적인 따뜻함과 포근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전북일보=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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