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조선황녀와 그를 사랑한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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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딸 '덕혜옹주' 출간
퇴위한 고종이 머물던 덕수궁 안 즉조당(卽祚堂)에는 1916년 4월1일 유치원이 문을 열었다. 한국인과 유치원 보모가 각기 1명씩 배치된 이곳에는 귀족 딸 7-8명 정도와 옹주(翁主)가 다녔다.

어느날 고종이 이곳으로 데라우치 조선총독을 인도하고는 이 옹주를 불러내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내가 만년에 얻은 아이라오. 이 아이가 있기에 덕수궁이 웃음소리로 넘쳐납니다. 내 노후의 쓸쓸함을 달래주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이 아이 하나입니다."
15년 동안이나 때로는 감시자로서, 때로는 시종으로서 고종 뒷바라지를 한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가 남긴 회고록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덕수궁에 웃음을 주었다는 이 아이가 바로 고종이 환갑이 된 1912년에 얻은 덕혜(德惠).

그의 출생을 순종실록 1912년 5월25일 조에는 이렇게 적었다.
"덕수궁 궁인인 양씨가 딸을 낳았다. 양씨에게 당호(堂號)를 내려 복녕(福寧)이라 했다."
그래서 다섯살이 될 때까지 덕혜는 복녕당 아씨라고만 불렸다.

덕혜는 1989년 4월2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 76세였다.

일전에 소위 '마지막 황세손'이라는 이구 씨가 사망했을 때도 그를 향한 눈길이 그러했듯이, 이덕혜에 대한 시각도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일생을 정리한다.

'10대 어린 나이에 일제가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가 교육을 받았으나 모국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해 괴로워 했다. 그러다가 옛 대마도 번주의 아들과 원치 않는 결혼까지 했다가 딸을 하나 두기는 했으나 지참금만 노린 남편의 냉대와 몰락한 왕녀에 대한 섬사람들의 무시 등으로 마침내 정신병원 신세를 졌다. 해방이 되자 급기야 남편에게 버림을 받아 이혼하고는 귀국해 낙선재에서 쓸쓸한 삶을 보내다가 죽었다.'
어느 정도 사실일까? 덕혜의 내성적이고 침울한 성격이 반드시 외부에서 기인한 것일까? 타고난 성격 자체가 그랬을 가능성은 없을까?
덕혜는 1995년 서울에서 상연한 연극 '덕혜옹주'라든가 이듬해 광복절 특집 드라마로 상영한 '덕혜'에서 불행한 생애를 강요당한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녀로 그려졌다.
하지만 최근 이훈 동북아역사재단 제1연구실장이 완역한 일본 여성사 연구가 혼마 야스코(本馬恭子)의 단행본 '덕혜옹주'(역사공간)는 역사의 통념이나 상식에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를 보여준다.

혼마 역시 대체로 덕혜가 원치 않는 삶을 산 '불행한 여인'이라는 관점을 유지하긴 했으나, 잔학한 일본의 표상인 그의 남편 소 타케유키(1908-1985)에 대해서는 사뭇 다른 인간상을 제시한다.

요즘 같으면 '얼짱'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한 잘 생긴 외모에 나중에 시인이자 화가요 대학교수로 활동한 그에게서 배우거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다정다감한 인간이라 증언했다.

이것이 위선일까?
혼마는 시인이기도 했던 소가 남긴 각종 시와 글을 훑었다. 그랬더니 1955년 이혼한 데 이어 1962년 1월26일에는 하네다공항에서 특별기편으로 고국으로 돌아간 옛 아내 덕혜를 그리는 다음과 같은 시가 나왔다.

"그리는 아내여, 해궁(海宮)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 많은 새가 무리지어 날개치는가? /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에 /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 놓고는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 그리운 아내여, 이젠 오갈 길조차 끊어져 / 사랑하는 아이를 나는 그저 안고 내내 서 있을 뿐이라오."
덕혜와 소의 일생을 훑고 난 뒤 혼마는 둘의 만남과 결합은 "국가정책에 의한 결혼이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행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313쪽. 1만4천800원.(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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