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문턱에서
가을의 문턱에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소낙비가 지나 간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매미들이 와르르 운다. 햇살은 지구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가며, 지상에 따가운 햇볕을 보낸다. 이 세상 모든 나무와 풀들이 그 햇살을 받아들여 결실을 다듬어간다. 인간들이 아무리 ‘철’ 없이 곡식을 가꾸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생태와 순환을 조정하려 해도 오고 가는 계절은 어떻게 하지 못한다. 강가에 구절초 꽃이 핀다. 따라서 쑥부쟁이도 필 것이고, 마타리 꽃도, 물봉선화도 고마리 꽃도 피어날 것이다. 억새도 패고, 강아지풀도 패고, 그 억센 바라구 풀도 꽃이 필 것이다. 봄 여름 동안 피지 않았던 풀과 나무들의 꽃들이 다 핀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모든 나무와 풀은 다 꽃이 핀다. 한 떨기 가을꽃을 바라보는 것은 어김없는 자연을 보는 것이다. 어김없는 저 가을 앞에, 계절 앞에 고개 숙여라. 저 위대한 자연의 질서와 순환 앞에 무릎 끓어라. 겸손 하라.

올해는 소낙비가 유독 많았다. 비가 하도 국지적으로 그것도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기상청도 그 비의 게릴라성에 두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기상청의 날씨 오보를 가지고 말도 많았다. 그러나 기상청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우리 인간이 예측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가 사는 지구의 기후가 변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뜨거운 여름날 소낙비는 모든 곡식에게 거름이요 약이다. 특히 벼가 동 베어가는 8월 중순을 넘어서서 소낙비가 내리고 날씨가 확 들어버리면 햇살은 정말 뜨겁게 대지에 내리쬔다. 동네 어른들이 그런 날씨를 보며 “하따, 벼가 한 뼘씩은 커 불것다.” 하시며 좋아 하신다. 아닌 게 아니라 소낙비가 뚝 그치고 난 후 벼를 보고 있으면 벼가 쑥쑥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1년 중 가장 늦게 씨를 뿌리는 배추와 무씨를 뿌리고 쪽파를 심을 때다. 대개의 곡식은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수확을 하는데, 그 중에 무와 배추와 쪽파는 한 여름에 씨를 뿌려 가을 늦게 거둔다. 올해 먹은 농사로 무와 배추와 쪽파를 심을 때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배추 씨를 땅에 묻으며 물었다. “어매, 왜 이렇게 한구덩이에 여러 개의 씨를 묻어?” “한 개는 날아가는 새들이 먹고, 한 개는 땅에 있는 벌레가 먹고 땅위로 솟은 싹은 사람들이 먹는다.”고 하셨다. 이 말도 옛말이 되었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병충해와 날짐승 들짐승들이 텅텅 빈 마을을 ‘공격’한다.

농부들만큼 자연과 생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드물다. 동네 앞 정자나무에 잎이 피는 것을 보고, 소쩍새 우는 소리를 듣고 그해의 흉년과 풍년을 점친다. 달의 모양, 바람 부는 방향과 바람 속에서 느껴지는 습기로 비가 오는 것을 안다. 이 때 쯤 어디를 가면 강물에 다슬기가 많다는 것을 알았고, 짐승과 곤충들의 움직임을 보고도 날씨를 점쳤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 것을 오랜 전통으로 전해 주었고, 그렇게 자연이 가르쳐 준 교육내용을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농부들의 전통은 유구하다. 우린 그걸 잊고, 버리고 산다.

하늘이 높고 파랗다. 지상의 모든 나무와 풀과 짐승들이 부지런히 겨울을 준비한다. 위대하고 성스러운 자연의 약속을 농부들은 믿고 살았다. 그 것이 농사였다. 농부들은 땅에 곡식을 심어 곡식을 키우고 곡식이 익으면 거두어 자기도 먹고 세상으로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땅을 살리고 곡식을 살리고 자기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농부들, 그들의 저 오랜 삶을 우리들 삶의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다. 동네 어른들이 맑게 쏟아지는 가을 햇살을 보며 어둔 얼굴로 탄식하고 한탄한다. 우리들이 농사지은 것은 죄다 값이 땅이 꺼지게 떨어지고 우리가 사오는 것들은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고. 그러기를, 그런 세월이 그 얼마나 오래 되었던가. 가을의 문턱에 서서 농부들의 한숨이 우리 땅을 꺼지게 한다.

<김용택·시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