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시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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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시인>



날씨가 가물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가을은 가을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은 높고 눈이 부시게 푸르기만 합니다. 그 하늘 아래 나무와 풀들은 있는 힘을 다해 햇살과 바람을 빨아들이며 익어 갑니다. 강변이나 논두렁이나 밭가에 구절초 꽃이며 쑥부쟁이며 고마리 꽃이며 물봉선화 꽃들이 만발했습니다. 강아지풀도 억새도 갈대도 바라구 풀도 수크렁도 다 이삭을 피워냅니다. 밤송이들이 쩍쩍 벌어지고, 감은 붉은 얼굴을 세상에 내밉니다. 야산에 가보면 작은 오솔길에 밤과 상수리와 도토리들이 발 아래 툭툭 떨어집니다. 차를 타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차창으로 언 뜻 눈길을 주면 거기에 가을꽃들이 그렇게 피어 있습니다. 오! 저 꽃들 좀 봐라! 누가 가꾸지 않았어도 우리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도, 나와 언제 그러마고 약속을 하지 않았어도 마치 지상의 모든 것들과의 굳은 약속인 양 그렇게 눈이 시리게 피어납니다. 낮은 산자락 작은 마을 어느 집에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키 발을 딛고 낮은 슬레이트 지붕 난간에다가 호박쪼가리를 한 개 한 개 널고 있습니다. 오래 된 마을의 오래 된 저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고향 같은 굳은 약속입니다.



가을 풍경은 고향 같은 약속



시인은 그런 사람일 터입니다. 저기 저렇게 꽃이 피어 있다고, 저기 저렇게 산과 들에 곡식들이 익어간다고, 저기 저렇게 푸른 하늘이 있다고, 저기 저렇게 노을이 붉게 사위어 간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일러주는 사람일 터입니다. 크고 거대하고, 화려하고, 위대하고 찬란하고 높은 지위와 권력과 돈을 쥐고 세상을 흔드는 자들에게 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해 뜨기 전부터 해질 때까지 1t 트럭에 잡화를 싣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해가 지면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젊은 가장의 어깨에 내리는 어머니 같은 눈길일 것입니다.



발아래 떨어진 햇살 한 조각을 사랑해야 할 가을입니다. 정말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캄캄한 절망이, 때로 그런 삶의 난간 앞에 서서 우린 몸서리를 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절망 속에 서서 고개를 한번 돌려 보면 거기 마른 풀잎이 작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절망의 시든 풀잎에 바람이 되는 사람이 또한 시인일 터입니다. 이 가을에는 여러분들이 다 시인입니다.



시인은 절망의 풀잎에 부는 바람





가을바람이 부네요. 시 한편 실어 보내드립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별에는/모든 이들을 배부르게 할 만큼/충분한 음식이 있음을/나는 믿습니다.//모든 사람들이/함께 어우러져 평화롭게 사는 것이/가능함을/나는 믿습니다.//우리들이/총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며/모든 이들이/똑같이 소중함을/나는 믿습니다.//선한 기독교도와/선한 이슬람교도가/선한 유대교도와/선한 무신론자들이 있음을/그리고 내가 신뢰하는/모든 이들의 마음에 선함이 깃들어 있음을/나는 믿습니다.//만일 믿지 않는다면/어떻게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요./날마다/목마름에 슬피 우는 아이들이 있음을/그리고 날마다/싸움을 벌이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있음을/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어린아이들은 피부색과 상관없이/서로 어울려 뛰어놀고 있음을/나는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그리고 부디 이와 같은/희망을 간직한 이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소망하는 것이며/동시에 내가 믿는 것입니다./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진심으로 말입니다.’



벤자민 스바냐의 시 -아름다운 소망-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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