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떡’에 대한 정보를 버려야
‘남의 떡’에 대한 정보를 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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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항구도시에 내려갔다가 이틀 사이 세 개의 도시를 거쳐서 서울로 올라왔다. 고속 철도가 생겨서 서울에서 A시까지 이제 명실상부한 일일생활권으로 묶였다. “고속철도로서 이렇게 가까워졌으니, 경제도 좀 나아졌겠네요?” 내가 말했고, A시에 사는 상대편은 대뜸 고개를 저었다. “나아진 건 서울뿐이지요. 고속철도 때문에 A시 사람들이 이제 쇼핑을 서울로 하러 가니까요. 우리 A시 경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빠른 내리막길입니다. 게다가 수도권 규제까지 풀린다니, 정말 큰일이에요.”

나는 고속철도를 한 시간 정도 타고 B시로 올라왔다. “요즘 B시 경제는 어떻습니까?” 내가 또 물었고 마중 나온 사람은 단번에 손사래를 쳤다. 내가 A시에서 올라온 걸 알고서 “그래도 A시가 우리보다 낫지요. 우린 아예 결딴나게 생겼습니다. 정부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수도권 사람들만 국민이라는 건지 원” 하고 말했다. 내가 다음 날 C시로 올라간다고 하자 “C시는 행정도시다 뭐다 해서 우리보다 경기가 훨씬 나을 겁니다”라고 그는 또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C시 사람들의 대답은 딴판이었다. “아이고, 우리는 그놈의 행정도시 때문에 망하게 생겼습니다.” “아니 왜요?” “행정도시 해줬다고 생색내며, 정부에선 그 외엔 아무런 배려도 없었거든요. 차라리 행정도시 그거, 도로 가져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 솔직히 말해서 A시나 B시야 중앙정부 덕본 게 훨씬 많지요.”

서울로 올라온 다음 날. 수도권의 한 친구는 A시와 B시와 C시의 불만을 한 마디로 냉정히 쓸어덮었다. “수도권이 살아야 지방이 사는 것”이라고 했다. 기업도시다 행정복합도시다 하면서, 그동안 수도권을 묶어 놓고 지방에 온갖 재정지원을 해온 것은 명백한 정책적 오류라고 그는 지적했다. 인구의 절반이 모여사는 수도권 규제를 “확 풀어놔야” 그 혜택이 지방에 골고루 미친다는 논리였다.

깊이있는 논의는 물론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들 모두의 발언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장은 나 또는 우리보다 너 또는 너희의 ‘떡’이 크다는 것이었다. 개발의 연대를 숨가쁘게 지나오면서 우리도 모르게 키워온 이 ‘남의 떡’에 대한 과대 포장의 습관과 감수성은 이제 우리 모두의 집단 무의식 속에 돌이킬수 없을 만큼 너무도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나는 새삼 느꼈다.

‘남의 떡이 크다’는 정보로 가득차 있을 때 만나는 심사는 물론 상대적 박탈감이나 소외에 따른 분노일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이나 소외는 너와 나를 위험하게 가르고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으로서의 도덕성을 무화(無化)시킬 뿐 아니라 설령, 실질적으로 살림살이가 전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나아진 살림살이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행복론’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알랭은 행복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에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은 성공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기 때문에 성공한다’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남의 큰 떡’에 대한 너무나 많은 정보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환경 속에 놓여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 만의 정상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남의 떡’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남의 정상에 대한 정보일 뿐이므로 설령 ‘남의 떡’을 내가 그대로 가진다고 해도, 내게 그것이 ‘만족하는 지점’은 결코 될 수 없다. 자신이 인생에서 참으로 그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그 자신만의 정상을 꿈꾸기 때문에 ‘남의 떡’에 그다지 흔들리지 않으며, ‘남의 떡’에 대한 갖가지 정보 때문에 불행해지지도 않는다. 당장 비를 피할 집도 있고, 크든 작든 TV와 냉장고도 있고, 어쩌면 자가용도 갖고 있는 당신, 지금 행복한가, 불행한가?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 논리가 세뇌시켜준 서열주의에 따른 획일적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어쩌면 의외로 가까이 있을지도 모를, ‘만족하는 지점’ 곧 행복을 찾아 내가 품고 갖는 일이다. ‘남의 떡’을 쳐다보는데 바빠서 곁에 둔 ‘행복’을 혹시 스스로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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