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을 바꾼 것은 대기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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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출간
우리 역사상 17세기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조선 후기 경제사를 주로 연구해 온 김덕진 광주교육대 교수는 16세기 사림시대나 18세기 중흥시대 중간에 자리 잡은 이 시기에 대해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연구가 미진한 시기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17세기에는 그러나 조선사회를 뿌리째 뒤흔들만큼 강력했던 '대기근'의 시간이 있었다. 김 교수는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푸른역사 펴냄)에서 17세기 조선사회를 뒤흔들었던 '대기근', 그중에서도 현종 11-12년의 '경신대기근'에 주목했다.

오래전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대기근의 시간을 알게 됐다는 저자는 급격한 기후 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기후사'의 관점에서 17세기 조선을 바라본다.

17세기는 기후 변화가 유독 심했던 시기였다. 이상 저온 현상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지구를 휩쓸었고 학자들은 이 시기를 작은 빙하기라는 의미로 '소빙기'(小氷期)라고 부르기도 한다.

1670년 경술년과 1671년 신해년에서 앞자리를 따 '경신대기근'으로 불리는 대기근은 1670년 2월부터 보고된 가뭄에서부터 시작됐다. 윤달 2월 이후 본격화된 가뭄은 모내기를 해야 할 5월까지 이어졌고 결국 여덟 차례의 기우제 끝에 5월23일 비로소 큰 비가 내렸다.

비가 왔다고 좋아한 것도 잠시 이번에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5월 말 닷새 동안 내린 집중 호우를 시작으로 6월 폭풍을 동반한 태풍에 이어 10월 말께 일곱 번째 폭우까지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이와 함께 5월 초 발생하기 시작한 병충해는 6월 홍수와 함께 본격적으로 발생했으며 여기에 전염병과 가축병까지 겹치며 역사에 기록될만한 대기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기근의 피해는 전국에 공통된 것이었지만 제주도가 특히 심했다. 1671년 2월의 경우 얼거나 굶주리거나 역병으로 죽은 사람이 437명에 달했고 6월에는 굶주려 죽은 사람이 2천260명으로 전체 도민의 20-3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종실록에는 "남은 자도 이미 귀신 꼴이 되었습니다. 닭과 개를 거의 다 잡아먹었기에 경내에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어서 마소를 잡아 경각에 달린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사람끼리 잡아먹는 변이 조석에 닥쳤습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대기근은 2년 만에 가라앉았지만 17세기 조선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대기근에 먹을 것이 없어진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고 그나마 진휼(賑恤.흉년이 들 때 빈민들을 구제하는 제도)과 방역제도가 잘 갖춰진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서울은 당시 그 어느 지역보다 인구증가율이 높게 나타났고 이는 공간구성과 산업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일반적인 연구결과다.

민심이 흉흉해진 세상엔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이를 틈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상과 예언서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저자는 18세기 중반 발간된 정감록 또한 이런 상황의 연장선상이라고 말한다.

유민의 이동은 지역별 인구를 바꿔놓았다. 15세기 경상도, 평안도, 충청도, 전라도 순으로 인구가 많았지만 북쪽 지방의 혹한과 전염병을 피해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17세기를 지나면서부터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로 인구 순위가 바뀌게 된다.

신분별 인구 점유율에도 영향을 끼쳤다. 기근과 역병이 닥쳤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평민과 노비 같은 사람들이었고 그 결과 양반층 인구의 점유율이 증가했다.

대기근은 정치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현종 때 발생했던 두 차례 예송논쟁의 배경에도 대기근이 자리 잡고 있다. 기근을 '하늘의 경고'로 봤던 유교적 자연관 속에서 신하들과 재야의 선비들은 여러 가지 방책을 임금에게 강요했고 그 결과 마찰이 발생했다. 또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서인을 누르고 승리할 수 있었던 데도 대기근 당시 서인이 별 쓸모없는 정책이나 참상 부풀리기 등으로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해 임금의 신뢰를 잃었던 것이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저자는 대기근이 조선을 내적으로 강하게 만든 요인이 됐음에 주목한다.

임시로 설치되는 빈민구제기구 진휼청은 대기근을 여러 차례 거치는 동안 완전히 상설 기구로 자리 잡는 등 사회안전망이 구축되는 계기가 됐다. 또 백성을 구제할 재원 마련을 위해 납속(納粟)과 공명첩 발행이 성행하면서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재력으로 신분을 바뀔 수 있는 세상이 처음 시작됐다.

또 잦은 가뭄은 수차 보급과 제언사(수리시설과 제방을 관리하는 관청) 설치를 가져왔고 1678년 숙종 4년에 처음으로 주조된 상평통보 역시 진휼 재원 확보와 기근 구제를 위해 발행됐지만 화폐결제의 발달을 낳았다.

저자는 "지금까지 17세기를 바라본 시선은 위기 일변도였지만 17세기는 그 위기 속에서 새로운 '블루 오션'을 발견한 '기회의 시대'였다"라며 "전란, 북벌론, 반정, 예송, 환국, 대동법, 진휼청, 반란 등 조선의 주요 17세기사는 기후 변화와 밀접히 연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352쪽. 1만6천원.<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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