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농민 '선택권'은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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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전쟁' 출간
슈퍼마켓 선반에 수십 종의 시리얼이 놓여있다. 소비자는 '선택의 자유' 속에서 이 중 어떤 것을 선택하면 건강에 좋을지 고민을 거듭한다.

그러나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 회의가 열린 미국 시애틀 도심에서 식량주권 지지 시위를 조직했던 활동가이자 식량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라즈 파텔은 시리얼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소비자에게 진정한 '선택의 자유'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식량전쟁'(영림카디널 펴냄)에서 식량문제를 '선택'의 관점에서 들여다본다. 영국의 슈퍼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시리얼 28가지가 있지만 그 중 27가지는 당(糖) 성분비가 정부의 권장 수치를 초과하는 것이고 9가지는 당분이 40%나 포함된 것들이다. 결국, 종류는 많지만 건강을 생각하는 소비자가 선택할 여지는 사실상 없는 셈이다.

파텔은 이처럼 '선택'이 사라진 식탁 앞에서 이런 결과를 낳게 된 세계 식품업계의 실태와 구조적 모순을 파헤친다.

소비자가 선택의 권리를 잃게 된 것은 거대 식품업체의 등장이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대표적인 예가 커피다. 전 세계적으로 커피의 잉여생산량은 9억kg이 넘는다. 수요공급의 법칙에서는 초과공급이 이뤄지면 가격이 하락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간다의 커피재배업자 로렌스의 가족들은 고도가 높고 언덕이 많은 지형에 살고 있어 커피 생산 외에는 다른 생계수단이 없다. 그들은 커피 1kg당 14센트를 받고 현지 중개상들에게 커피를 넘긴다. 현지 중개상들은 커피 가공공장에 가공처리비 5센트를 덧붙여 kg당 19센트에 커피를 판매한다. 가공을 거쳐 포장지에 담긴 커피는 kg당 운임 2센트로 운송되고 총 운임만 26센트가 덧붙여진다. 우간다의 대규모 커피 수출관리업체는 kg당 1센트 수익을 남기고 이를 대형 커피회사에 판매한다.

대형 커피회사에 들어가는 커피가격은 kg당 1.64달러. 하지만, 이 회사의 공장에서 커피가 처리되는 순간 가격은 kg당 26.40달러로 폭등한다.

이 결과 과잉생산에 시달리는 커피 재배업자는 연명이 힘들지만 커피회사의 수익은 천정부지다. 싼 가격에 우간다의 커피 재배업자가 도산한다 해도 이 회사는 무서울 게 없다. 베트남으로 거래선을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남아프리카 더반의 슈퍼마켓에는 107가지 다양한 커피가 판매되지만 4.6m 높이의 선반에 놓인 이 커피들은 모두 한 가지 커피회사의 브랜드를 달고 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또 다른 원인은 유통망의 병목현상 때문이다. 농부와 소비자는 수백만 명이지만 납품업체와 매장의 수는 수십만 개이고 제조업체의 수는 수천 개에 불과하다. 다시 이 상품들을 구매할지 결정하는 구매데스크(buying desk)의 수는 100여 개로 줄어든다. 한마디로 식품 유통과정은 농부와 소비자가 양끝을, 구매데스크가 가운데의 오목한 부분을 차지하는 모래시계와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되고 농업 종사자와 소비자 사이의 통로를 좌우하는 모래시계의 허리가 잘록할수록 '병목기업'들의 파워는 커지고 소비자와 농민의 선택권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파텔은 비만과 기아, 가난과 부의 편중 문제를 이처럼 소비자와 농민의 선택권이 제한되고 대신 거대 식품업계가 권력을 쥐게 됐기 때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며 식품업계의 권력이 형성된 과정과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세계적인 움직임들을 소개한다.

파텔은 '선택의 권리'를 되찾으려면 개인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전 지구적인 연대를 강조한다.

"'하나'가 되는 방법은 '복수'가 돼야 한다. 이는 우리의 의사결정과 음식을 좀 더 이해하려면 지역적, 국제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중략) 지금이야말로 조직을 결성하고 교육하며 음식을 만끽하고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할 때다"(443쪽)
유지훈 옮김. 512쪽. 1만5천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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