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마음의 시인이 쓴 '깨끗한 영혼의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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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장애 승일이군 엄마와 매일 쓴 '기록일기', 최근 시집으로 엮어

제주시 아라동, 뜰에 잔디 깔린 한 주택. 모자(母子)가 다정히 앉아있다.

장애인 아들에게 엄마가 물었다. “뭐가 보여?” 대답이 무심하다. “몰라요.”

이어진 대화. “아무 것도 없어?” “아, 저기 단풍나무요.” “단풍나무가 뭐해?” “떨고 있어요.” “왜?” “바람 부니까, 두려워서요.” “두려운 게 뭔데?” “왕따에요….”

아들은 엄마에게 찡긋 눈짓하더니 연필을 들고 노트에 적었다.

‘바람에 단풍나무 가지가 흔들린다/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나무는 괴로울 것이다/ 이학년 때 왕따당하고 내가 울었던 것처럼/ 나무도 울고 있을 것이다// 나의 피부는 부드럽다/ 나의 마음도 부드럽다/ 그래서 단풍나무는 봄부터 잎이 곱다// 나도 저 단풍나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살 것이다’

이승일군과 어머니 고혜영씨.

이승일군(18)은 그렇게 ‘관찰일기’를 써왔다. 엄마 고혜영씨(50)가 한 시인의 권유로 고안한 일종의 학습이다.

승일이는 매일 강아지, 비, 달 등과 대화 후 기록했고 글귀는 차츰 절묘한 비유를 달고 시화(詩化)했다. 눈(雪)이 다투고 밥통이 메롱 하고 점멸 신호등이 율동하고….

최근 승일이의 글 110여 편이 책으로 엮였다. 시집 ‘엄마, 울지 마세요 사랑하잖아요’(연인M&B 刊)다.

그가 자연 사물 사람과 주고받은 말의 기록은 시의 옷을 입고 초롱초롱 빛난다. 깨끗한 영혼의 필사본이다.

“세상엔 현실 톱니바퀴, 역사 톱니바퀴, 하늘 톱니바퀴가 있다. 하늘이 자연을 통해 전하려는 언어를 우리말로 받아쓰는 존재가 시인이라면 승일이야말로 감성 코드를 하늘의 톱니바퀴에 접속한 파란 마음의 시인임에 틀림없다.”(고정국 시인)

승일이는 고씨와 아빠 이상순씨(53), 누나 영은(25), 형 승민씨(24) 가족의 막내. 승일이로 인한 고통이 왜 없었을까. 고씨는 부부가 승일이를 인정하기까지 긴 세월이 걸렸다고 했다.

“막내는 출생 후 ‘경기’를 했어요. 왠지 불안했죠. 서울대병원에서 뇌에 손상이 있다고 판정했죠. 4살이 돼도 몸을 못 가눠도, ‘늦은 아이가 똑똑하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었습니다.”

승일이의 8살, 취학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때까지도 대소변을 못 가려 도저히 등교가 불가능했다. 취학 연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장애인등록을 했다. 무시무시한 ‘사회적 편견’이 도사리고 있는 줄 미처 몰랐다.

“성인장애인들의 폭행사건 후 경찰서에서 목격여부를 신고하라는 통지문이 날아왔어요. 장애인가족임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피눈물이 났죠.”

또 가출로 집안에 비상이 걸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고씨는 “승일이가 잘못돼 버리길 바랄 때도 있었다. 하늘은 왜 하필 내게 모진 벌을 주나 원망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승일이는 이 집안의 영원한 보배다. 별칭은 ‘천재’란다. 아담한 대문의 문패에도 ‘승일이네 집’이라고 크게 적혔다. 나머지 식구 이름과 관계가 그 아래 하나하나 나열돼 있다.

다시, 승일이와 엄마의 대화. “승일이 커서 뭐될래?” “경찰이요.” “무슨 경찰?” “교통경찰이요.” “왜?” “교차로에서 교통 정리하는 모습 너무 멋져요. 음, 교통사고도 막아주고요….”

<김현종 기자>tazan@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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