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보고 - ⑧ 미군정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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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협상 직후 공격명령…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대 350명에 의해 시작된 무장봉기에 대해 미군정은 이 사건을 처음에는 군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 ‘치안상황’으로 간주했었다.

이는 당시 제주도외에서도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저항이 전국적으로 발생해 좌.우익 간 무력충돌이 빈번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제주경찰감찰청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사령관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를 설치하고, 다른 지방에서 2차례에 걸쳐 200명의 경찰을 증원하고, 오후 8시 이후 통행금지와 다른 지방과의 해상교통을 차단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이와 함께 미군정은 다른 지방에서 서북청년단원 500명을 제주도로 보내는 등 사태의 원인에 대한 처방 대신 응원경찰과 우익청년단체을 강화하고 힘으로 제압하려 했다.

이 같이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갖고 있는 도민들의 정서에 역행하는 조치를 함으로써 도민들의 반발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제로 4.3 발발 1개월 후 제주도를 시찰했던 광주지검의 김희주 검찰관은 “4.3사건의 직접적 계기가 5.10선거 반대였다면 간접적 계기는 서북 출신 경관들의 과도한 태도에 분개한 인민의 반항”이라고 지적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에 있던 국방경비대 제9연대 역시 이 사건을 도민과 경찰.서청 간의 무력충돌로 간주하고 군이 개입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3여단 참모장 백선엽 중령도 무장봉기가 일어난 4월 3일 제주읍에 머물고 있다가 이 사건 발생 보고를 받고도 ‘치안문제’로 보고 바로 제주를 떠날 정도로 상황을 가볍게 여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경찰은 군의 개입을 유도하고 사태를 확대하기 위해 일부러 산간마을에 불을 지른 뒤 무장대의 짓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군과 경찰 간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군이 처음 제주읍에 특별부대를 파견해 4.3사건에 개입한 것은 사건 발생 10일 후인 4월 13일이었으나 김익렬 제9연대장은 군부대의 파견과 관련, “정부의 재산과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고 확수하기 위한 것이지 진압이 목적이 아니다”라고 군사개입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미군정 수뇌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에 대한 도민의 저항이 거세지자 경찰력만으로 대응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4월 17일 경비대 제9연대를 진압작전에 동원시킨 데 이어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를 제주도에 파견하는 등 군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딘 미군정 장관은 제주지역을 총괄적으로 책임지고 있던 제주주둔 미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에게 진압작전에 참여하는 군 병력의 작전을 통제하고 진압작전에 경찰이 아닌 군이 직접 나서도록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군작전으로 인해 이뤄진 포로인 경우 경찰에 인계하지 말라고 한 데 이어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해 항복할 기회를 주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미군정은 이처럼 사태 초기에는 무력진압에 따른 유혈충돌보다는 경찰의 개입을 차단해 도민들을 진정시키고 군이 직접 나서 무장대와 평화교섭을 함으로써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김익렬 제9연대장과 김달삼 무장대총책 간 평화협상

이런 과정을 통해 4월 28일 김익렬 제9연대장과 무장대 총책인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이 이뤄졌다.

이는 김 연대장의 증언에서도 확인되는데 딘 미군정 장관의 명령을 받은 맨스필드 중령은 무장대의 귀순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유해진 도지사, 김정호 제주비상경비사령관,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제주도민족청년단장에게 책임자로 나서줄 것을 요청했으나 모두가 기피해 결국은 김 연대장이 나서게 됐다.

이 같은 요청을 받은 김 연대장은 4월 22일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를 통해 살포했다.

전단의 내용은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우리는 과거 반삭 동안에 걸친 형제 제위의 투쟁을 몸소 보았다. 이제부터는 제위의 불타는 조국애와 완전한 자주통일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을,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형제 제위의 적나라한 진의를 잘 알았다.

이에 본관은 통분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이 이상 백해무득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경비대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다. 나는 동족상잔을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 우리가 회합할 수 있는 적당한 시일과 장소를 여하한 방법으로든지 제시하여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에 무장대는 즉각적으로 응답했으며 4월 28일 대정면 구억리에서 김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 평화협상이 열리게 됐다.

4시간 동안 진행된 평화협상결과 72시간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4개항에 합의에 이른 것이었다.

또 합의된 귀순절차는 회담 다음날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각각 귀순자수용소를 설치하고 점차적으로 서귀포.성산포 등지에도 수용소를 세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미군정 딘 장관의 지시에 의해 평화협상을 추진한 맨스필드 중령은 협상 결과에 만족을 표시하고 전 경찰에 대해 지서 밖의 외부활동을 일절 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협상 3일 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를 방화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 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졌고 이후 제주4.3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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