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왕 록펠러의 명성과 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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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 ‘사람사는세상’을 닫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면서, “이미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명예도 도덕적 신뢰도 바닥이 나버렸다,” “도덕적 파산은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피의자의 권리는 별개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말이 있다. 1347년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칼레시민의 목숨을 구한 유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 등 6명 귀족들의 희생정신이 담긴 “고귀한 신분에 따른 윤리적 의무”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사례로 록펠러제국을 건설한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를 들 수 있다.

록펠러는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와 신앙심 독실한 어머니의 6남매 중 둘째로 뉴욕주 리치포드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10살 때까지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의 잘못으로 행복했던 가정은 어려움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도덕과 예의범절에 엄격했고, 열성적인 신앙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잘 양육했다.

록펠러는 1855년 칼리지에서 6개월 경영코스를 마치고 경리 및 캐쉬어로 일했다. 1859년 자본금 2천 달러를 마련하여 친구와 동업으로 잡화상을 차렸다.

인생의 전기는 미국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1863년에 과감히 클리브랜드에 정유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번창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1870년에는 자본금 100만 달러의 주식회사 형태를 갖춘 오하이오 스탠더드석유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온갖 편법을 동원해 다른 정유회사들을 하나하나씩 인수하면서 급속도로 사업을 확대하여 나갔다.

록펠러는 33세 때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는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된다.

최고 전성기에는 상상조차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미국 전체 석유공급량의 95%를 주물러 허생전과 같은 소설 속에서만이 가능한 ‘완전독점’을 현실에서 달성한다.

그는 53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 당시 억만장자는 록펠러 혼자뿐이었다. 록펠러의 재산을 현 시세로 계산하면 빌 게이츠 재산의 3배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정치권 매수, 경쟁업체 협박, 문어발식 확장, 중소기업 기술 빼앗기, 주가조작 등 악덕기업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비판을 한꺼번에 받았었다.

그러나 말년에 접어들어선 록펠러는 “내 재산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면서 자선사업가로 변신하고, 시카고대학교, 록펠러의학연구소(록펠러대학교), 록펠러재단, 록펠러센터 등을 설립한다.

인류복지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록펠러재단은 카네기재단, 포드재단과 더불어 미국 최대 규모로 손꼽힌다. 그는 98세라는 천수를 누리기까지 자선과 복지, 반전, 환경, 교육, 의료, 문화 등의 사회운동에 전념하면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록펠러는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뻔뻔하며 무자비하고 탐욕스런 인물’이라는 평가와 함께 ‘미국 기업인중 가장 훌륭한 인물,’ ‘좋은 일을 한 선행가’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그는 처우개선을 요구하던 노동자들을 총칼로 진압했어도, 오늘날 우리에겐 자선사업가로 기억되고 있다.

이처럼 그의 평가는 거대기업 독점의 시작이라는 것에서부터 현대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극과 극을 살다간 록펠러, 그의 삶처럼 그는 여전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극과 극의 물음을 던져 주고 있다.

<송병식·제주대 교수·경영학·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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