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진상보고 - (19) 마을공동체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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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은 돼지우리 같은 집에서
건초 깔고 해초로 연명”


제주4.3사건은 수백 년동안 삶의 터전으로 가꿔온 중산간지역 모든 마을을 초토화하고 중산간지역 마을 주민들을 사지로 몰아넣어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고 가족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군.경토벌대가 1948년 가을부터 중산간지역 마을 주민들을 해안으로 소개하고 마을 주민들이 떠난 중산간지역의 집과 농토를 불사르는 초토화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삶의 근거지를 잃은 마을 주민들은 해안으로 이주했지만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고 해안으로 이주하지 못한 많은 중산간 주민들은 산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폭도로 몰려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중산간지역 소개작전을 완료한 직후 작성된 주한미군사령부의 기록은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저항을 없애기 위해 모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유격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계획’을 채택했다. 학살의 대부분은 제9연대가 점령한 1948년 12월까지 자행됐다.…(중략)…섬에 있는 주택 중 3분의 1이 파괴됐고 주민 30만명 중 4분의 1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45개 마을과 부분적으로 파괴된 43개 마을로부터 피난민들이 해안 마을의 수용소로 이동해 왔다.”

이 같은 기록은 군.경토벌대가 중산간 마을을 소개할 때마다 민가를 빠짐 없이 소각해 마을 전체가 초토화됐음을 보여준다.

1955년 제주도청에서 작성된 ‘4.3사건 피해상황 조사’를 보면 가옥이 소실되면서 발생한 이재민이 5만5887명에 이르고 중산간지역 소개에 따른 이재민이 1만2645명으로 총 6만8532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제주읍이 2만639명으로 가장 많고 애월면 8916명, 한림면 8750명, 조천면 6013명 순으로 많았다.

또 당시 주기용 국회의원이 1949년 3월께 10여 일간 제주도를 답사한 후 자유신문에 기고한 ‘제주도답사기’에 따르면 소실된 가옥이 1만6177호에 3만461동, 양민 피해자 수가 1193명, 부상자 수가 419명, 이재민 수가 8만6797명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은 “이재민은 식량.의류를 운반할 틈도 없이 피난한 관계로 문자 그대로 돼지우리처럼 만든 집 속 땅바닥에 건초를 깔고 그냥 기거하며 해초.산초로 그날그날 겨우 연명해 가는 형편…(중략)…이 가련한 꼴을 바라보는 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당국은 1949년 하반기부터 중산간 마을에서 내려온 주민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정착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우선 완전 소각된 마을부터 재건에 착수했지만 재목 벌채와 수송의 어려움 때문에 임시로 함석집이나 초막을 지어 주민들을 수용해야 했다.

또 재건마을은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원래 살던 거주지가 아니라 잔여 무장대의 습격을 막고 무장대를 마을과 격리, 고립시키는 전략촌으로서 일정 지점에 건설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국 각지에서 피란민이 제주도로 밀려들어옴에 따라 4.3 피해 복구도 제대로 되지 않은 제주도는 주택난과 식량난으로 최악의 상황을 맞아야 했다.

1950년 7월 16일 1만명의 피란민이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1951년 5월에는 14만8000명에 이르러 피란민 수가 원래 제주도민 수의 절반 이상을 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52년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이어진 절량(絶糧)사태는 제주사회를 위기로 몰아넣어 기아자가 속출하고 정부의 구호양곡을 놓고 피란민과 4.3사건 이재민 사이에 심각한 쟁탈전마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중산간 마을 복귀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1963년 제주도청 사회계장 김인화가 발표한 ‘4.3사건 이재민 원주지 복귀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이재민 8만65명 가운데 3만9916명이 자력으로 복귀했고 나머지 4만149명 중 복귀 희망자 1만7915명에 대해선 2개년 계획으로 복귀정착사업을 추진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 기록은 4.3사건으로 인한 마을 공동체의 피해가 15년 이상 지속됐음을 확인시켜 준다.


주민 4분의 1이 마을 파괴로 해안 이주
중산간 ‘잃어버린 마을’ 84곳에 달해
대부분 마을서 수십 명씩 집단희생


# 잃어버린 마을들


4.3사건이 발생한 지 15년이 지났음에도 4만여 명이 원주지로 복귀하지 않은 것은 원주지 복귀를 꺼렸거나 도저히 복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4.3사건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난민정착복구사업이 실시됐음에도 이처럼 원주민이 복귀하지 않아 폐허가 돼 버린 마을들, 이른바 ‘잃어버린 마을’이 4.3실무위원회가 2000년과 2002년 두 차례 조사한 결과 84곳에 이른 것으로 확인됐다.

‘잃어버린 마을’은 대부분 중산간 초토화작전으로 전소된 지역으로, 지금은 잡초가 우거지고 빈 집터에는 대나무만 남아 옛날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말해준다.

지역별로는 제주시 31곳, 서귀포시 4곳, 북제주군 35곳, 남제주군 14곳이다.

84군데 잃어버린 마을에서 발생한 희생자 수는 966명으로 전체 주민 8360명의 10%를 넘어선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이들 마을 중 대부분이 수십 명이 집단으로 희생된 아픈 기억을 갖고 있었다.

제주시 화북동 곤흘동에서 23명이 한꺼번에 희생됐으며 오라동 연미마을 섯동네에서 40명, 해안동 리생이에서 50명, 이호동 호병밭에서 75명, 멧밭에서 80명이 희생됐다.

또 서귀포시 대천동 영남마을에서 50명, 중문동 사단마을에서 30명, 북제주군 한림읍 명월리에서 20명, 애월읍 소길리 원동마을에서 40명, 조천읍 선흘1리 물터진골에서 40명, 남제주군 남원읍 남원2리 고냉이논밭에서 20명,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100명, 삼밭구석에서 50명, 상천리 오리돈물에서 40명, 표선면 가시리 새가름에서 25명이 희생됐다.

4.3실무위원회는 이들 ‘잃어버린 마을’ 가운데 12곳을 선정해 표석을 세웠는데, 표석에는 마을별 피해 상황과 폐촌 경위 등을 새겨놓았다.

이에 대해 4.3진상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조사된 ‘잃어버린 마을’ 외에도 추가로 조사할 필요성이 있음을 언급하고 마을별 피해상황에 대해서도 정밀하고 체계적인 조사가 요구된다고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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