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통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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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끝나면서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예전에는 이맘 때면 물 좋기로 소문난 내 고향 강정에 구명물이 터져 마을을 통과하는 골새에 장어들이 찾아들었고, 웃동네와 섯동네의 통물에는 차가운 샘물이 흘러 넘쳤다.

개구쟁이들은 골새에서 물장구 치기에 바빴고, 통물은 자리회와 냉국을 만드는 데 제격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통물은 더이상 식수로 사용할 수 없고, 골새는 복개되어 도로가 되고 말았다.

도내 상당수의 용천수에서 질산성 질소가 검출되고 있고, 대부분의 마을 개천들은 하수구로 변한 지 오래다. 어찌 보면 냄새나는 개천을 그대로 두기보다는 복개하여 도로나 주차장으로 만드는 게 현명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복개하여 상가로 사용하던 산지천을 복원했고, 고가도로가 놓여 있던 청개천을 복원하겠다는 걸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30여 년 전엔 많은 비용을 들여 복개하더니 이제는 복원하느라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 있으니 말이다.
제주도의 하천 생태계가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통시’가 없어지면서부터다.

통시는 없애야 할 부끄러운 유산이 아니라 생태계의 순환적 원리를 잘 응용하여 생태적 삶을 살았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통시는 단순한 화장실이 아니었다. 통시는 돼지 사육장이었고, 가정용 하수종말처리장이었으며, 유기질 비료 공장이었다.

음식물 쓰레기와 인간 배설물은 돼지 사료가 되고, 그렇게 키운 돼지는 살림 밑천이 되며, 돼지 배설물과 생활쓰레기는 기름진 퇴비가 되었다. 제주도의 통시는 쓰레기 배출을 ‘제로’로 만드는 생태적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통시를 더럽고 부끄러운 곳으로 여겼다.

하지만 더러워야 할 곳이 더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더러워야 할 곳이 더럽지 않으면 정작 깨끗해야 할 곳이 더러워지게 된다. 통시가 더럽다고 화장실로 고치는 순간 깨끗해야 할 하천이 더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천이 더럽다고 복개하는 순간, 깨끗해야 할 지하수와 바다는 오염되기 시작하였다.

더러워야 할 곳은 조금은 더러워도 괜찮다. 그래야 정말 깨끗해야 할 곳이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도시야 어쩔 수 없지만 농촌에서조차 통시를 없애버린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자연에서 물질은 끊임없이 순환하기 때문에 생태계는 쓰레기를 전혀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산업에서는 자연자원을 상품으로 전환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쓰레기를 양산한다. 오늘날 경제와 환경이 충돌하는 이유는 생태계가 순환적인 반면에 산업은 직선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와 환경을 동시에 살리기 위해서는 쓰레기를 자원화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점을 간파한 파울리(G.Pauli)는 ‘쓰레기 제로배출 연구소’를 만들어 한 산업의 쓰레기를 다른 산업의 자원으로 활용할 방법(ZERI)들을 모색하고 있다.

콜롬비아 커피농장들이 한때 커피원두 가격의 폭락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ZERI 방법을 응용하여 탈출하였다. 커피원두가 수확되면 커피나무는 고가의 열대버섯을 키우는 데 사용되고 버섯의 찌꺼기는 지렁이, 소, 돼지 등의 먹이가 되며, 지렁이는 닭의 먹이가 되고, 소와 돼지의 배설물은 커피농장과 채소밭의 퇴비가 되며, 생물가스의 에너지는 버섯 재배 과정에 다시 사용된다.

콜롬비아 농민들은 이런 생산 시스템으로 커피를 유기농으로 재배했고 지역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일자리와 수입원을 창출했다.
제주 농업이 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희망은 있다. 통시야말로 ZERI 방법의 ‘하르방’이 아닌가. 그러나 ZERI 방법이 성공하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생태계의 순환원리를 본떠 조직된 산업의 군락이고, 둘째는 그 군락이 형성된 지역공동체의 인간 네트워크이며, 셋째는 제주도의 생태계, 기후조건, 문화적 배경 등에 적합한 여러 산업 군락들을 설계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과학자들의 네트워크이다.

현대판 통시인 ZERI 방법이야말로 제주도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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