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벽서와 실명 신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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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문정왕후의 수렴정치하에 소윤파(小尹派)가 정권을 잡아 나라를 망치고 있을 때 지금 서울의 양재동에 있었던 양재역(良才驛)의 건물벽에 피로 쓴 대자보가 나붙었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국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奇) 등이 아래서 국정을 농락하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이 피의 대자보가 나붙자 정권을 잡고 있던 소윤파에서는 대윤파의 짓이라고 보고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다.
이 숙청은 준비된 듯이 조직적이고 철저히 진행됐는데, 이 때문에 대윤파 숙청의 빌미를 잡기 위해 소윤파에서 스스로 조작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 당쟁시대에는 이런 벽서가 어찌나 자주 나붙었는지 정조임금 때 우의정 오시수(吳始壽)는 “익명으로 글을 지어 길가에 걸거나 관문에 써 붙이길 숱하게 하니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하고 이런 벽서를 보고 태우지 않거나 그것을 보고 말을 전하는 자는 장 80을 치며 벽서를 붙인 자를 잡은 자는 급은(給銀) 10량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정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자는 실명으로 상소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런 벽서는 조선 말까지 계속돼 고종임금 때는 ‘개나 돼지 피로 쓴 혈서를 위장한 벽서를 다스리는 법률’까지 공포됐었다.

▲중국에서 대자보가 등장한 것은 문화혁명이 갓 시작된 1960년대 후반 베이징대학에서였다.
극좌파에서 수정주의를 비판한 이 벽서로 인해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85만명이 죽고 290만명이 박해를 받았다.

당시 상하이 지역의 벽서는 대학노트를 한 장 찢어 쓴 작은 것도 있고 낡은 신문지에 붓글씨로 쓴 것도 있었는데, 큰 것은 하얀 종이를 29장이나 이어서 쓴 것도 있었다.

이 가운데 실명으로 쓴 것은 10%도 안 되고 90% 이상이 익명 벽서들이었다.
그런데 상하이 시민들은 실명 벽서보다 익명 벽서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익명 벽서가 중대한 사건을 고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제주시청에서 인터넷 신문고에 익명으로도 글을 올릴 수 있도록 해 왔는데, 욕설과 근거 없는 비방 등이 많아 실명제 운영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자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69%가 실명제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얻었다는 것이다.
사실 익명의 문제점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실명제로 전환할 경우 자칫 조선시대에 실명상소 운운했던 일을 답습하는 것 같아 보일 것 같고 또 상하이의 경우로 보아 그 알맹이가 쏙 빠져 90% 줄어들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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