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과제 - 미군정은 무엇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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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치유 없이 시종 강경진압 전개
자국 이익 위해 한반도 정책 수립
3·1 발포사건으로 민심이반 가속
4·3 확대 책임 반드시 규명돼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4.3사건이 8년여간 지속되고 수만명이 희생될 정도로 사태가 확대된 것에 대해 미군정은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는 광복 이후 미군정이 제주도는 물론 군사.정치 등 국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상황을 통제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남한을 접수하면서 공표한 포고문을 통해 자신의 실체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분명히 했고 그 같은 토대 위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 정책을 수립하고 다뤘다.

미 육군은 1945년 9월 제주도를 점령해 군정을 실시하면서 일체의 치안, 재산, 권력 뿐만 아니라 조선 백성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아울러 미군정이 1947년 3월 1일 사건 이후 4.3의 전개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수집한 정보와 정세 판단을 근거로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해 왔음이 그동안 4.3진상조사과정에서 밝혀졌다.

즉 ‘불개입의 개입’을 통해 현장에 직접 나서지 않는 대신 전략정보와 전술정보를 장악하고 모든 군령권과 작전통수권을 행사하면서 조선인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살육행위를 불사했다는 것이다.

특히 4.3의 결정적인 고비에서 미군정이 택한 정책은 제주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2차세계대전 이후 조성된 미.소를 중심으로 한 동서간 냉전체제라는 기본질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사회주의세력 확산 저지와 친미정권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측에서 볼 때 이념의 전장이자 대소련 봉쇄 전진기지였던 한반도에서 한국 국민이 희망하는 민주적인 정부 수립, 자주적이고 통일된 정부 수립은 중요하게 고려할 요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성공 여부를 결정지을 한반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 정복자로서 군사통치를 했고 일제때 통치기구를 그대로 활용하고 친일파를 친미파로 재조직해 정당을 이용한 데 이어 미군정 정책을 계승하고 미국에 종속적인 정권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더욱이 미군정은 한반도를 지배했던 3년간 미곡정책의 실패로 민생난을 가중시킨 데 이어 친일경찰을 군정경찰로 편입하고 좌익세력을 불법화했으며 일제잔재 청산에 실패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다.

4.3진상조사보고서도 이 같은 미군정의 실정이 4.3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미군정은 4.3의 기점이 된 1947년 3.1 발포사건으로 악화된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도민들이 가장 적대하는 경찰을 동원해 강경대응을 하는 바람에 3.10 총파업을 유발하는 등 민심이반을 가속시켰다.

또 4.3 무장봉기가 북한 또는 남로당의 지령에 따른 것임이 사실이 아님에도 미 군정은 이 같은 미확인된 사실을 기정사실화해 여론을 호도하기도 했다.

아울러 미군정은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 무장대 총책의 4.28 평화회담을 무산시킴으로써 평화적 해결의 마지막 가능성을 차단하고 대규모 양민 학살의 단초를 열었다.

4.3 이후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가장 결정적 기회였던 평화회담에서 72시간내 전투 완전 중지, 무장해제 점차 추진, 주모자 신병 보장 등 3개항의 합의가 도출됐으나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고 5월 3일 미군이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함으로써 협상은 깨지고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로 치닫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미군정 장관이던 딘 소장에 의해 평화회담이 성사됐으나 주한미군을 책임지고 있던 하지 중장의 초강경진압방침에 따라 평화가 아닌 전쟁으로, 질서가 아닌 무질서로, 문명사회가 아닌 야만과 광기의 아수라장으로 돌변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귀순공작에서 무력에 의한 강경진압정책으로 미군정의 정책 변화가 제주도 사태의 상황 전개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미군정의 역할과 책임은 반드시 규명돼야 할 문제다.

더욱이 미군정은 5.10 단선 실패 이후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해 초강경진압작전에 나섬으로써 그 책임성이 명확해졌다.
4.3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각계에서 4.3 발발의 원인을 찾아 치유하는 것이 중요했으나 미군정은 원인 치유책에는 관심이 없고 강경진압 일변도로 치달았는데 브라운 대령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으며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란 말은 미군정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실제로 브라운 대령은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버리는 작전’을 구사함으로써 제주사태 해결에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부작용만 낳았음을 이후 전개과정이 말해주고 있다고 4.3진상조사보고서는 기록했다.

이후 제주도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구금하는 작전을 전개한 결과 제주 섬사람들이 이를 피해 산으로 올라간 것을 두고 미국측에서는 성공적으로 수행됐다고 평가했다.

또 당시 미군보고서가 1948년 가을부터 다음해 겨울까지 함정토벌, 대살, 집단살육이 자행된 대량학살계획인 중산간 초토화작전을 전개한 군경토벌대에 대해 계속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평가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미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 자기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대응하는 이념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으며 그 첫번째 대응이 제주4.3이었고 이를 통해 남한에서 ‘친미반공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아직까지 제주4.3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발생한 사건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한국전쟁 중 발생했던 ‘노근리 학살’에 대해 진상조사 등 호들갑을 떨었던 미국이 제주4.3에 대해선 반세기가 넘도록 묵묵부답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제 미국은 자유와 평화, 인권을 중요시하게 생각한다면 그 의문에 스스로 대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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