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과제-4·3은 제주도민만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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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전체 맥락에서 이해·해석돼야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 첫 사례
역사적 보편성·특수성 내재된 사건
민간 학살사건 규명에 결정적 역할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4.3정부보고서)가 지난 15일 55년여 만에 정부의 공식보고서로 채택됨에 따라 광복 이후 정부 수립,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던 과정에서 발생했던 국가 공권력에 의한 수많은 인권침해행위 가운데 첫 사례로 인정됐다.

이제 4.3은 한국현대사에서 잘못된 과거 청산의 첫 대상이라는 점에서 향후 4.3처럼 냉전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고 굴절됐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광복 이후 분단이 확정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그 성격에 있어 이와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던 다른 지방의 사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4.3은 이 시기의 다른 사건들의 진상 규명도 함께 이뤄져야 4.3의 특수성과 한계를 벗고 역사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만큼 4.3정부보고서가 냉전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한국현대사를 해석하는 데 혁명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록 4.3정부보고서가 4.3의 역사적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광복과 미군정,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던 과정에서 국가 공권력이 국민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행사했음을 확인하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4.3은 제주만의 4.3이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 이해되고 해석돼야 그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4.3은 역사적인 보편성과 특수성이 내재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우선 보편적인 측면에서 볼 때 4.3은 한국현대사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발전과정의 한 부분이다.
20세기 한반도는 조선 후기 반봉건 반외세운동이 시대의 흐름이었듯이 일제시대에는 민족해방운동, 광복 이후에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국가 수립운동이 역사의 저변에 흐르는 큰 물줄기였다.

특히 광복 이후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위)와 인민위원회(이하 인민위)는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해 아래로부터 형성돼 가던 초기 정치권력이었으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해 한반도 남쪽에서라도 반공 친미정권을 수립하려던 미군정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면서 붕괴됐다.

이 과정에서 발생했던 1946년 10월 대구항쟁(10월 폭동), 1948년 2.7구국투쟁, 남북연석회의를 통한 자주적이고 통일된 국가수립운동, 여순반란사건 등은 미군정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친미우익정치세력에 맞서 단선.단정 반대운동(반미 자주적 통일운동)과 그 흐름에 놓여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운동의 지도부인 좌익정치세력과 일반인들이 많은 피해를 봤고 분단 냉전시대를 지배한 독재체제에 의해 이념적 굴레가 덧씌워졌으며 반세기 넘게 폭동과 반란으로 규정됐다.

친미 반공의 논리만이 판을 치던 정치공간에서 이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은 반미 공산세력으로 몰렸고 한국전쟁은 이 같은 흐름을 더욱 고착시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의의 시도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4.3은 이 같은 보편적인 역사 흐름의 연장선에 있으며 50여 년간 지속된 이승만 정부와 한국전쟁,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금기시되고 철저히 은폐됨으로써 진상과 진실의 기억으로부터 망각을 강요당해왔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와 함께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라는 측면에서 세계사적인 보편성도 갖고 있다.
4.3은 잘못된 국가 공권력 행사가 하나의 국가 내부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발현됐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칠레,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아르헨티나, 대만 등에서 처리했던 과거 청산의 사례들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면밀히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이는 4.3이 이와 비슷한 다른 사건들의 해결을 위한 시작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건들이 전국적으로 다발했음에도 제주 섬에서 발생한 4.3이 특수하게 8년여간 지속되고 수많은 양민들이 죽음으로 내몰려야 했는가.

이는 4.3이 제주도라는 지역의 역사적이고 지역적인 특성을 반영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반도와 떨어져 있고 어업과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공동체였으며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전략적 군사요충지로 개발이 이뤄졌고 미군정이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통제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지역적 특수성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광복 이후 권력의 공백기에 처해 있던 제주지역은 자연스럽게 항일운동 주도세력의 도덕적 권위 아래 공동체적이고 자주적인 관리와 통제가 적절히 이뤄질 수 있었다.

건준위와 인민위가 섬 주민의 합의 아래 굳건한 토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그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다른 지방처럼 이념적으로 정치적으로 세력의 분열이나 갈등 양상은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1946년 과도입법의원 선출시 남로당은 보이콧했음에도 제주지역에서는 인민위 출신이 과도입법의원에 선출된 점은 제주도가 본토와 다른 특수성을 잘 반영한 사례다.

제주도에서 인민위와 미군정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협조적인 관계가 지속되고 별다른 충돌이 없었던 것도 주목된다.
그러나 1946년 제주도(島)가 독립된 행정단위인 제주도(道)로 승격된 이후 다른 지방에서 도지사가 파견되고 경찰이 증강되고 서북청년단이 제주도로 들어오면서 제주 섬주민과 다른 지방 세력 간 정치적.감정적인 충돌과 갈등 대립이 발생하게 됐다.

이 같은 대립은 점차 정치색을 띠어 갔고 제주 섬주민들은 생존권적 위협받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특히 4.3을 기점으로 규정된 1947년 3월 1일 기념식은 서울지역은 좌우 세력 등 정치세력 사이에 갈등이 표출되면서 쪼개져 둘로 진행돼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제주지역은 좌.우익으로 나뉘어 치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이 숨지고 중상을 입었다.
여기에 미군정의 정책 실패와 연이은 흉년은 광복 이후 제주도로 유입된 수많은 인구를 소화해낼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공황사태로 이어졌고 민심은 악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자주적인 공동체 질서가 다른 지방 세력에 의해 와해되기 시작했고 정당성과 도덕성을 상실한 다른 지방 정치세력과 생존을 위해 대항함으로써 전면전으로 확대된 것이 바로 4.3인 것이다.

결국 제주 4.3은 한반도 어디에서도 발생할 수 있었고 실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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