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阿片)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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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1842년에 발생한 아편전쟁은 아편문제를 둘러싼 청나라와 영국 간의 전쟁으로 그 직접적인 계기는 광저우(廣州)에 파견된 흠차대신 임칙서(林則徐)가 영국상인들에게서 무력으로 아편을 빼앗아 불태워 버리면서 비롯됐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대량의 홍차와 은을 얻기 위해 아편을 무차별적으로 중국인들에게 팔아온 영국은 중국의 아편시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

1840년 여름, 영국은 함선 48척과 4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대규모 함대를 끌고와 청나라를 위협했다.
무기력한 청나라는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연전연패했고 결국 영국의 반식민지화나 다름없게 하는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우리들이 중학교 시절에 이미 배운 내용들이다.
허면 흠차대신 임칙서는 왜 아편을 불태웠는가.
당시 청나라는 쇄국정책을 폈고 유일하게 광저우항에 대해서만 외국과의 무역을 허용했고 영국이 광저우항의 외국무역을 주도하고 있었다.

중국으로부터 대량의 홍차와 비단 등을 수입하는 대신에 중국에 대한 별다른 수출품이 없었던 영국은 식민지인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수출 수단으로 삼고 밀매형태로 중국을 공략했다.

영국의 상인들은 처음에 중국인들이 아편에 맛을 들이게 하기 위해 헐값에 보급했고 중독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값을 점차 올리면서 당시 화폐격인 은을 끌어모았다.

그들이 아편을 무차별적으로 보급하고 은을 끌어모으는 데는 청의 정치관료들이 한몫을 했다.
부패한 청의 관료들은 영국상인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밀수를 눈감아주면서 흥청망청 살았고 덕분에 무지한 백성들만 아편에 중독되면서 도탄에 빠지게 됐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청황제가 임칙서를 시켜 아편금지령을 엄격히 실행하도록 했지만 결국 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치권과 재벌이 결탁해 수백억원의 검은돈을 주고받으며 썩어가고 있고 대다수 국민들은 카드빚에 몰려 자살하는 사례가 속출할 정도로 경제적인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정부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인 듯 싶다.

이 와중에 정부가 최근 담뱃값을 1000원이나 올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니 국민건강을 위해 금연을 유도한다는 것보다는 영국상인들이 부정부패한 청의 정치관료들과 결탁해 중국인들을 몰락시키면서 아편을 팔아먹었던 행태가 문득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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