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연 누드’ 이후(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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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컨셉트 영상집’의 제작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이었다면, 그 서비스는 다음달 1일 85주년을 맞는 삼일절(三一節) 당일부터 모바일 서비스업체 ㈜시스윌을 통해 제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영상프로젝트’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만을 남기고 옛날 아닌 옛날 일이 되어버렸다. 미혼(未婚)이라곤 하지만 벌써 눈가에 주름마저 와버린 30대 후반의 한 여성 연예인의 연출된 ‘누드 영상’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그다지도 아우성이었는지 끔찍하기 짝이 없다.

‘낮은 목소리’(감독 변영주)를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문제의 ‘영상프로젝트’는 우리 안의 ‘낮은 목소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결여한 채 물상화한 잘못이 크다. 당사자의 말에 따르면 “계약금은 따로 없었지만 프로젝트 수익금에 대해 러닝개런티를 받기로 했다”하고, 또한 ‘이 사업을 추진한 인터넷 복권업체 ㈜로토토의 전략팀 이사로 취임하기로 되어 있었다’하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일의 결과만을 두고 단순하게 개인 혹은 영리단체의 ‘역사의식의 결여’가 초래한 언필칭 상업화 운운하는 도덕주의 결론은 더욱 나쁜 것이고 사실 더 무서운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우리 모두의 원혼(寃魂)이 동시에 이곳에서 분출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우선은 물신(物神)에 상처받은 원혼이겠다. 아무리 선한 동기에서 출발하였다손 치더라도 ‘타인의 아픈 기억’을 아무런 사전 동의 없이 경제 행위에 사용한 경우라면 그것은 프로로서 최소한의 윤리를 어긴 큰 잘못이다.

문제는 “아무 주제의식이 없었던 기존 연예인 누드에서 탈피한 ‘누드의 블록버스터’”라고 한 ㈜네띠앙엔터테인먼트측의 사업 설명에 쾌재를 부른 이들이다. 그 자들이야말로 이러한 ‘작품’의 생산을 부추기는 주요 소비대중이 아닌가? 비판을 빙자하여 관련 사진을 마구잡이로 내보내는 언론 방송 매체의 무의식적 지향 또한 이 점에서 꼭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원죄와도 같은 벌거숭이 인간들의 천진함이란 어떤 측면에선 합리주의와 그것에 힘입고 진화해온 히스토리(He-story)로서의 자본주의 문명이 키운 악령(惡靈)의 보복일지 모른다. 육체는, 오만한 이성의 타자로서, 감성의 정직한 대리인으로 이해되었고 나아가 인간해방사상과 결합하면서 정신에 앞서는 인간의 본질로까지 절대화되었다. 이러한 절대화에 브레이크를 걸며 가장 큰 가르침을 주는 것으로 역사의 경험만큼 좋은 것이 없다. ‘위안부’ 문제는 그 대표적 예증이다.

‘지옥의 묵시록’(감독판)에 잘 나타나듯, 전쟁의 형식 안에서 사디즘과 매저키즘은 최악으로 결합하여 인간의 육체를 카니발의 도구로 삼을 뿐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국가이성과 역사인식, 나아가 예술창작의 근처에도 마찬가지로 떠돌고 있다.

중국의 관영통신사 신화사(新華社)가 ‘이승연 누드’ 저지 성공을 타전하며 한국의 높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치켜세워 흥미롭다. 항일전쟁(抗日戰爭)을 선전하며 출범한 기관답다.

그러나 자국민의 애국심 고양을 위한 자연스런 유도라고 봐야 옳다. 갈수록 노골화하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와 중국의 ‘고구려사 기술 문제’만 보더라도 이 점은 분명하다.

이제부터라도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거나 ‘정신대(挺身隊)’와 같은 용어의 사용 여부부터 발본색원 재검토하면서, 과연 우리가 관심을 두거나 혹은 집착하는 일이 무엇을 위한 방법인지 아니면 그것이 목적이 되어야 마땅한지에 대하여 올곧은 생각으로 나아가야 한다.

과연 우리는 ‘이승연 누드’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면서, 방법을 말하였는가, 아니면 목적 자체를 말하였는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이승연 누드 사건’을 두 번 죽이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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