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출정한 제주해병
9월에 출정한 제주해병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길거리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바람결에 산들산들 나부끼고 있다. 어느덧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오곡백과는 영글어 간다.

이러한 9월이 오면 나는 제주와 해병대를 늘 생각하곤 한다.

그 무대는 무려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때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신생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처럼 국운이 깜빡이고 있었다.

이런 때 제주 청년들은 총궐기하여 일제히 구국전선에 나섰다.

그때 육군에서도 많이 참전하였지만 특히 제주 출신 3000여 명은 해병대 3기와 4기생으로 대거 입대를 했다.

당시 전황은 시시각각 조여드는 다급한 상황이므로 신편 해병연대는 1950년 9월 1일 오전 8시에 수송선편으로 제주항을 떠나 9월 6일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이어서 출동준비를 서둘러 9월 12일에는 미 해군 피카웨이호에 탑승을 하였으니 이게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서막이었다.

이 세기적인 도박이라 불렀던 대반격 작전은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순양함 마운트매킨리호에 좌정을 하여 총지휘를 했다.

그 산하에는 네드알몬드 미 육군 소장이 이끄는 제10군단 7만5000여 상륙군이 함정 속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구성은 미 해병 제1사단, 미 육군 제7사단, 제주 출신이 주축을 이룬 한국해병연대 그리고 한국육군 제17연대였다.

그리고 세계에서 최대 위용을 자랑하는 전함 미조리를 비롯한 순양함, 구축함, 항공모함 등 261척이 유유히 파도를 가르며 인천으로 가고 있었다.

드디어 9월 13일부터 함대에서 번쩍 하는 섬광이 일고 ‘우르르, 쾅’ 하는 함포사격이 연신 계속되었다.

9월 15일 밀물이 밀려들자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피카웨이호의 높은 갑판에서 바다로 하선망이 내려졌다.

한국해병들은 그물 같은 밧줄을 붙잡고 한 발 한 발 아래로 내려 상륙주정에 옮겨 탔다.

그 후 다음 올 사태를 상상하며 주정의 문이 열리자 “야!” 하는 함성을 지르며 비나라는 적색 해안에 적전 상륙을 감행했다.

이 때 경인지역의 북한군은 최용건을 방위사령관으로 하여 제18사단과 제9사단 그리고 급조한 25여단 등 2만 병력이 주둔해 있었고, 인천에는 2500명이 수비를 하고 있었으나 우세한 미군의 화력 앞에 여지없이 분쇄되고 말았다.

이 때 해병들은 쉴 틈도 없이 인천시가전을 치르고 78㎞의 경인가도를 달려 9월 20일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도하했다.

이제는 서북부에서 수도 서울로 진공해야 하므로 104고지전투, 연희고지전투를 치르며 9월 22일에는 드디어 서대문에 돌입하였다.

그 후 9월 26일 오전 6시10분 불타는 중앙청 옥상에 드디어 한국해병대가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를 하늘 높이 게양하였다.

아! 감격의 순간, 적치하 3개월 만에 동포는 학살.약탈.납치 등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제주해병은 9월 28일에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고 이어서 도솔산 전투, 김일성고지 전투, 원산 상륙, 장단 전투에서도 용감히 싸웠다.

그리고 많은 전몰호국용사와 부상자도 나왔다.

그 불멸의 신화를 남긴 제주해병들의 애국적 공훈은 청사에 영원히 빛나야 하고, 그 우국충절은 후세에 길이길이 전승되고 귀감이 되어야 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