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1999년 말, 새 밀레니엄의 축복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음을 기억한다. 전자문명(電子文明)의 타락과 통제 불가능성을 미워하던 사람들로부터 ‘Y2K’(일명 ‘컴퓨터 대란’)가 “정말 왔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실제로 떠돌았던 것이다. ‘모든 잘못이 어떤 불가항력의 힘에 의해 깨끗이 종식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신념’의 표출이었다. 요사이 우리 사회 일각에 ‘탄핵 정국’을 두고 “마침 잘 왔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얘기가 들린다. 비록 ‘Y2K’ 때와는 다른 상황이지만, 사로(思路)는 똑같은 것이다. 그 순진한 ‘신념’이 이해되지 않는 바 아니지만, 곰곰이 생각할 것 없이 정말 어리석고 극단적인 발상이다.
최악의 상황일지라도 최고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주권을 보호하려고 마련해놓은 그 제도적 장치가 온 나라를 진공(眞空) 상태로 묶어놓아 얼마간 불안하기는 하지만, 매화(梅花)가 망울을 터뜨리면 봄의 아지랑이가 멀지 않았음을 깨닫듯, 이 진통을 통해 권력이 국민에게 있고, 주권이 얼마나 엄존한 생물(生物)이며, 그것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의 관심 속에서 비로소 생명을 유지하는지 우리 모두가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모두가 광장(廣場)을 내주고 다시 생활의 현장에서 열심인 풍경은 국운이 아직 성성함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병인에 면역하고 건강한 생명을 탄생시키고야마는 여성성이 봄기운을 타고 발랄하게 장단을 맞추는 일은 ‘탄핵 정국’ 속에서 우리 국민이 보상받은 화중지복(禍中之福)이다. 정치계의 여성의 두각은 그 뚜렷한 징후다. 그것은 남성의 세계 인식 독점하에서 전개된 역사가 인간적 삶의 최상의 표현이 아니라는 결론과 짝을 이루고 있다. 여성이 줄줄이 대표 주자가 되는, 아니, 대표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도래는 무슨 정치적 이해득실의 낮은 차원에서 선택된 방편이 아니라 크게 보면 종당에는 중용(中庸)으로 접어들고야 역사 진행의 합법칙성의 서장(序章)이라서 더욱 반갑다.
그러나 정치가 합법적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개인의 인격이 존중받지 못하고 모두의 삶이 질적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계량적 수치나 절차적 합법성은 무색한 법이다.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의 삶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권력의 공백이 엉뚱한 오기로 돌파되거나 이합집산의 장난으로 비화하여 권리의 이행을 심각히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불행 중의 불행이다. 권리의 충돌은 자치단체간 가장 첨예하고 또한 비일비재한 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방자치제 실행이 낳은 원죄적 부메랑이다.
선거 때면 이 부메랑은 터보엔진을 달고 우리를 강타하곤 한다. ‘국민의 정부’ 때 첫 삽질해놓은 국가적 사업이 ‘참여정부’ 출범으로 몇몇은 난맥상이었고 ‘탄핵 정국’, ‘선거 정국’으로 인해 더욱 가뭇해지고 있다. 과연 국제자유도시 건설이 그 위험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추진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국민이 거주하는 국토의 일부라는 점을 대오각성하고, 높은 문화의식이 숨 쉬는 자유도시를 만들어 가는 일에 우리 스스로 더욱 용맹정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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