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시작과 마감에서의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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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탄생이란 참으로 신비한 과정이다. 24시간 정도밖에 살 수 없는 난자와 72시간 정도밖에 여유가 없는 정자의 만남이란 조물주의 허락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오묘한 조화의 산물이다. 또한 보통 한 달에 하나밖에 산출되지 않는 난자만을 만나려는 목적을 지닌 정자는 수억 개 중 단 50개 정도만 난자 주위에 도달하고, 그 중 하나만이 난자의 막을 통과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과정은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조차도 만들 수 없는 프로그램에 의거하여 진행되는 과정이다. 이렇게 시작된 생명은 출산의 과정을 통해 이 세상을 맞이하게 되고, 새 생명의 탄생을 지켜보며 우리는 출산의 과정에서 고통을 겪은 산모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새 생명 탄생에 축복을 보낸다.

그러나 고통을 겪었던 산모 옆에는 그나마 의료진이나 가족이 있어 외롭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태아는 어떠한가? 그 어둡고 좁은 산도를 홀로 통과해야 하는 외로운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순간 태아들의 느낌을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그 힘든 과정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작용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삶에서 이겨낸 사람은 산모뿐만 아니라 우리의 새 생명인 것이다. 그러기에 자연출산을 한 아이들이 제왕절개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보다 삶에 대한 적응력이 높고 인지적으로 뛰어나다는 연구결과들이 보고되나 보다.

생을 마감하는 죽음 또한 홀로 가야 하는 외로운 길이다.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죽음을 생각해 볼 것이다. 보통 우리는 그 죽음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먼 사건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주위에 상을 당한 분의 소식을 많이 접할수록 나이가 들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고 어르신네들은 친지의 상을 당하면 자신의 일인 양 더욱 슬퍼지는 것이리라. 어쨌든 우리 인간이란 죽음 앞에선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기에 삶의 한 과정인 죽음을 언제든지 맞이해야 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삶의 양태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언제 이런 날이 오더라도 그간의 삶을 반성도 하고 그나마 뿌듯해할 수 있다면 죽음을 후회없이 맞아들일 수 있는 자아통합감을 획득하게 될 것이고, 그 간의 삶이 후회와 원망의 연속이라 생각하면 죽음을 회피하려 절규하는 절망감을 가질 것이다.

얼마 전에 사랑하는 친정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보아야 했다. 많이 노쇠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한 그럴 때 기분이 어떨른지 궁금하기는 했어도, 아직은 돌아가시지 않을 것이란 안이한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음식 드시는 게 어려워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뵈러간 게 운명을 지켜보는 시간으로 바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갑자기 눈을 뜨시지 못하고 말씀도 못 하시는 어머니께서 점점 저 세상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산 자가 도와줄 수 없음에 따른 무력감과 안타까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멈추는 호흡을 보며 ‘숨쉬세요!’ 하고 외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잘 가세요! 편안히 가세요!’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순간 ‘나’라는 생명을 탄생시켜주고 잘 자라도록 온갖 것을 희생하신 부모님께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안타까움과 왜 생전에 더 효도를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로 인해 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님께 영원한 죄인인가 보다.

이제 어머니께선 홀로 먼 여행을 떠나셨고, 나 또한 이 세상에 홀로 온 것처럼 이 세상을 홀로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하루의 삶조차 너무나 소중해 하며, 내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여 마음 깊이 행복을 느끼는 진실한 나날을 살고 싶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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