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나게 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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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관 국립암센터 의사·시인 >

필자의 어린 시절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의 간절한 소망은 자녀가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장기간 실업자인 바람에 가난했던 우리 형제들도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의사가 되는 길을 택했지만 둘째 형이 사법고시에 합격함으로써 아버지는 꿈을 이루었다.

 

시집와서 20여 년 간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몸을 바쳐야 했던 어머니를 친척들이 처음으로 부러워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고시 합격은 '돈도 빽도 없는' 서민의 자녀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는 가장 확실한 통로이다.

 

지금 서민들의 그 꿈이 흔들리고 있다. 둘째 형이 지금 고등학생이라면 법관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우선 법관이 되려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로스쿨에 들어가야 하는데 로스쿨은 3년간 학비만 해도 엄청나다. 당시 대학 입학금조차 친척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둘째 형이라면 법관의 길을 조용히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가 선진화한다는 것은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도리어 이런 측면에서 후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중산층의 일부가 빈곤층으로 내려가고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는데, 빈부의 격차는 학력의 격차로 이어져 계층의 세습화와 고착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과거에는 능력 있고 성실한 젊은이들이 사회에 진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의 문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달 소위 '공무원 채용 제도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 개편안의 핵심은 내년부터 5급 신규 공무원의 30%를 민간 전문가 가운데서 뽑고 이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2015년부터는 신규 공무원의 절반을 전문가로 채우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 뽑는 채용 방식이 '가진 자'에게 절대 유리하다는 것이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 딸의 특채 사건은 많은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처럼 응시 조건과 심사위원 선정 및 심사과정까지 불법과 탈법으로 얼룩진 경우는 예외라 하더라도 아무리 공정하게 이 제도를 운영해도 그 경쟁은 처음부터 불공정한 것이다.

 

전문가를 우대해서 뽑는다고 하면서 학위를 강조하는데 대학 입학해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10여 년을 돈을 벌기는커녕 억대의 돈을 써야 하는데 합격할 확률이 극히 낮은 그 기회를 바라고 장기간 투자할 서민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욱이 서민들 자녀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불공정 경쟁은 대학입시에서부터 시작된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하던 1970년대에는 오로지 입학시험 하나로 합격을 결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고 대학마다 다양한 입학전형을 도입하고 있다.

 

입학 사정 방식을 다양화할수록 서민들의 자녀는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강남의 '있는 집' 자녀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외국에 나가서 1~2년씩 어학연수를 하기도 하고 방학동안에 수백 만 원씩 들여서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국제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따라서 입학사정관들 앞에 서면 온갖 다양한 국제 경험에 대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골에서 책만 읽다가 올라 온 죄 없고 눈 맑은 청소년들은 빈약한 자기 경험 때문에 면접서류에 '글로벌 시대에 부적합한 아이'로 분류되어 불합격의 쓴잔을 받을 확률이 높다.

 

그럼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우선 국가의 특별교육기금을 통해 폭넓은 장학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서 가난한 아이들도 능력만 있으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해 줘야 한다. 만약 로스쿨이 꼭 필요한 제도라면 로스쿨의 30% 정도는 전액 장학금 제도를 만들어서 오로지 공부만 잘해도 로스쿨을 졸업할 수 있는 길을 터 줘야 한다. 그래야 가난한 서민의 자녀도 법관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우리나라 특권층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특권층이 아닌 서민들이 희망을 갖는 사회가 밝고 바람직한 사회이다. '공무원 채용 제도 선진화 방안'이 그들만을 위한 선진화가 되지 않도록 특채 제도를 폐지하거나 극히 제한하여야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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