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보낸 돈에는 진한 땀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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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제주인 100년사...1.현해탄을 건너다

올해는 경술국치 100년, 제주인의 재일본 거류사도 100년이 되는 해다. 조국을 빼앗긴 식민지하에서 강제징용, 학업, 취업, 이민 등 다양한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은 저마다 진한 인간사를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재일동포 1세대부터 경계인으로 고민하는 4,5세대의 이야기를 수회에 걸쳐 소개한다. 현재 일본에 제주를 본적으로 둔 재일동포는 10만명에 달하고 있다. 재일동포는 63만여 명으로 이 가운데 15.9% 제주 출신이다. 경북이 36.8%, 경남이 24.8%, 전남이 9.6% 등이며 북한 출신은 1.2%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제주도와 제주발전연구원이 공동으로 펴낸 ‘在日濟州人 愛鄕 百年’을 참조했다. [편집자 주]

 

▲현해탄을 건넌 제주인들
현해탄은 원래 일본의 ‘겐카이나다(玄海灘)’에서 나온 말로 일본 큐우슈우 북서부의 해역이다.
동쪽 오오시마섬에서 서쪽 이키섬에 이르는 깊이 50~60m의 바다이며 예로부터 우리나라와 일본 북부 큐우슈우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로다.

 

그렇다면 제주도 출신 재일동포들은 어떻게 현해탄을 건넜을까.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이나 제주섬에 살고 있는 60대 이상이면 대부분 제주~부산~대판(오사카)간 정기여객선인 군대환(君代丸.키미가요마루호)에 얽힌 이야기 한 두가지를 기억하고 있다.

 

▲ 러시아 전함을 개조해 만든 여객선인 키미가요마루(君代丸)는 제주 사람들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제일 제주인의 이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재일동포들이 처음으로 이역땅으로 나가기 위해 탔던 여객선이며, 본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런 동포들을 눈물로 보냈던 ‘떠나가는 배’였던 것이다.

 

그만큼 재일제주인의 이민사에서 君代丸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정기여객선은 1922년 10월부터 취항했으며,제주와 下關(시모노세키)까지 24시간, 다시 下關에서 大阪까지 24시간 걸렸다. 일본말로 ‘키미가요마루’라고 불렀던 君代丸은 원래는 러시아군함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 전함을 전리품으로 빼앗아 민간인에게 불하한 것이다.

 

이 배는 월 3회 산지항을 기점으로 운항하면서 입출항시에는 조천.김녕.성산포.표선.서귀포.고산.한림.애월포구에 기항했다.

 

1927년 2월 당시 18살의 나이에 부모 몰래 이 배를 탔던 강귀범씨(서귀포시 법환동)는 자서전 ‘망향의 여로’에서 다음과 같이 승선기를 적고 있다.
“부두에서 1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정신없이 걸었다. 혹시 누가 뒤를 밟지라도 않나 싶어서 자꾸 뒤돌아보았다. 왠지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부두가 가까워지자 발의 속도가 빨라졌다. 승선하고 나서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부친이 금방이라도 달려와 강제로 하선시킬 것만 같아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마침내 배가 조용히 포구에서 떨어졌다. 안도의 숨과 함께 나와 제주도를 잇고 있었던 실이 끊어져 버린 듯한 쓸쓸한 생각이 치밀었다. 대판까지는 2일이나 걸리는 여정이었다.”
그도 “일본에 가기만 하면 무엇인가 돈벌이가 생기고, 그래도 제주도 생활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로 현해탄을 건넌 것이다.

▲미지의 땅 일본
도일 1세대들의 초기 일본생활은 대부분 고된 생활로 청.장년기를 보냈다. 1920년대 초 제주~ 大阪간 항로 개설 이전, 부산을 거쳐 일본에 건너간 제주 출신 동포들은 君代丸 등의 취항 후 일본으로 들어오는 고국의 동포들을 맞아 직장과 하숙을 알선하는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강귀범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쉴틈조차 없을 만큼 뼈빠지게 일하고 더럽고 좁은 방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생활해야 했다. 공장에서 검댕으로 온 몸이 새까맣게 됐다. 작업복을 통해서 검댕은 몸에 달라붙었다. 일터에서 돌아오면 욕탕을 들어가 몸을 씻는다. 그러나 검댕은 쉽게 씻겨지질 않았다.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북북 문질러야만 했다. 잠잘 때는 서로의 손 발이 닿지 않게 되도록 몸을 웅크리고 자야 했다. 일본에 가면 누구든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현실이었다.”

 

▲ 일제 강점기 시코쿠 제 84연대 제 2대대로 징용된 사람들.

1924년 君代丸을 타고 대판으로 갔던 허청씨(서귀포시 서홍동)는 도일 초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앞서 일본에 건너가 형과 함께 도일 3년만에 200엔을 고향의 부모에게 송금했다고 했다. 당시 200엔으로 토지 1840평을 100엔20전에 샀으며 집과 집터 240평을 사고도 얼마정도 남았다고 했다.
한달에 8엔 정도 저축할 수 있는 이들 형제가 200엔을 송금하기 위해 이국에서 얼마나 고생했는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재일동포 1세대의 성공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꾸노(生野區)와 제주인
제주 출신은 일본내에서 대판부(大阪府)에 집중됐다. 大阪府에서도 이꾸노(生野區)는 ‘일본 속의 제주’라고 불린다.

 

1923년 君代丸 취항 이후에는 1년에 3만6000명까지 일본으로 실어 날랐는 데 종착 항구가 大阪港이어서 제주 출신들이 大阪지역에 집중화 현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재일동포사회를 거론할 때면 ‘大阪’을 먼저 떠올리게 되고 제주 출신 재일동포 사회를 이야기할 때는 ‘生野區’를 첫머리에 꺼내게 된다.

 

이곳에서 재일동포 1세대들은 메리야쓰공장이나 염색공장, 유리공장 등에서 일하면서 삶의 터전을 닦기 시작했다.

 

서울대 인류학과 이문웅 교수는 ‘재일한국인의 문화접변에 관한 연구’를 통해 生野區를 ‘작은 제주’라고 표현했다.
이 교수는 이 곳이 제주도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꾸노(生野區)의 제주사람들이 ‘작은 제주’의 이미지를 형성한 것은 나름대로 독특한 제주도 토착문화의 요소들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제주 출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토속음식이 있고 제주도의 방언들이 살아 남아 있다. 현재의 제주도에서는 이미 상당히 변모해 찾아보기 힘든 문화요소들이 이 곳에서는 제주사람들의 일상 생활과정에 여전히 한 부분으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제주도보다 더 제주다운 곳’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거기에는 희로애락을 서로 나누며 가지고 훈훈하고 따뜻한 인정이 있고, 어려운 일을 서로 돕고 사는 상부상조의 전통적인 생존전략들이 제주사람들을 여전히 한덩어리인 ‘우리 제주사람들’로 묶어 놓고 있다.”
고동수 기자 esook@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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