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홍련(阿羅紅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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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뿜어내던 그 싱싱함과 진초록의 물결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 제주의 온 산야가 은색의 물결로 출렁거린다. 억새들이 겨울을 준비함이다. 아니 이제 더 새롭고 튼실한 생명체를 잉태하고자 하는 자연의 몸부림일 게다. 한라산 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오색 단풍의 물결도 이제 곧 스러지고 나면 겨울이다. 자연의 섭리가 이러할 진데 이 가을 나는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삶을 살 순 없을까? 하는 다소 황당한 생각에 잠기게 된다. 모든 것이 떠나는 이 계절에 우리네 인생 항로를 끝내는 부고(訃告)를 자주 접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우면서 요절(夭折)에 가까운 부고도 있고 백수(白壽)를 살며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을 법한 호상(好喪)도 접한다.

오늘도 우리 마을 인근은 대형 장례식장에 오는 조문객들의 차량행렬 때문에 좁은 농로가 북새통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 아니던가? 그래서일까? 조의를 표하려는 차량행렬은 줄어들 줄을 모른다. 그렇다. 요절을 했든, 백수를 누리든 인간은 좀 더 살고 싶은 게 본능이다. 그러나 어쩌랴? 떨어져야 하는 게 자연의 섭리다. 진초록으로 여름을 났던 저 낙엽들을 보라. 이제 스스럼없이 바람에 몸을 맡겨 떠나고 있지 않은가? 제 자리를 비워주고 있지 않은가?

모두가 떠나는 이 계절에 왜 나는 아라홍련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진초록의 싱싱함이 넘쳐나던 지난 여름 700년 만에 꽃을 피운 고려시대 연꽃. 바로 아라홍련(阿羅紅蓮)이다.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의 옛 지명을 따라 아라홍련이라 이름을 붙인 이 연꽃은 발견된 10개의 씨앗 중 3개가 꽃을 피워 올렸다고 한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그 자태가 영락없이 고려시대 탱화 속 그 모습이었다니 난 타임머신을 타고 고려시대로 회귀한 듯한 환상에 빠졌었다.

700년 전 고려시대 씨앗이 어떻게 오랜 시간 땅속에서 견뎌냈을까? 생명의 힘이 정말 놀랍다. 씨앗은 종자 스스로 발아 여건을 갖췄다고 해도 주변 여건이 부적당하면 종자상태 그대로 남을 수 있다고 한다.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우리네 삶과 인생도 이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병마와 싸우며 힘든 삶을 움켜쥐고 살아가는 많은 이웃들이 고통스럽고 힘들 때 휴면(休眠) 상태의 씨앗으로 남아 후세를 기다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지금의 힘든 삶을 접고 한 백년 후 아름답게 환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일 퇴근길은 우리 마을 인근 장례식장이 텅텅 비었으면 좋겠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좀 더 아름답게 훌훌 털고 떠날 수 있게 시간이 우리에게 많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이 가을 우리는 어떤 씨앗으로 살아가고 있을까를 생각해 볼일이다. 아라홍련의 튼실한 씨앗이 700년의 긴 세월을 견디 듯, 먼 훗날 아름답게 꽃피울 행복한 삶을 그리며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고운진.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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