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빙의 교실
박빙의 교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수능시험 D-15일. 고 3 교실은 박빙(薄氷)의 호수처럼 위태롭다.

수시 모집이 많이 늘어났다지만, 아이들이 선호하는 대부분 대학이 최종 합격 판별 도구로 수능성적을 요구하고 있어서 이미 수시모집에 합격했더라도 수능 결과가 나쁘면, 그 동안의 공든 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정시모집에서는, 수능 점수가 합격을 결정하는 가장 큰 변인이기에, 아이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신새벽에 등교하여 책상을 마주하는 아이들. 전쟁같은 하루를 보내고 밤 12시가 되어서야 자리를 뜬다. 입시지옥의 일상이 1년여 간 반복되다 보니, 심신(心身)의 건강상태가 눈에 띄게 좋지 않다. 풋풋한 젊음의 향기 대신 핏기없이 까칠한 얼굴들이 안쓰럽다.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학습 긴장으로 목이 타 기침하는 친구들에게 괜히 눈을 흘긴다. 생리 불순으로 수업 중에도 화장실을 들락거리는가 하면, 병든 병아리처럼 한 번 졸기 시작하면, 솔개가 채 가도 모를 정도로 잠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반 아이들 대부분이 이른바 ‘탈진 증후군’인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에 빠진 것이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 정서적인 피로로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거부 등에 빠지는 번아웃 신드롬은,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정신 질환이다. 그런데 원하는 대학합격을 위해, 어쩌면 초등학교 때부터 좌고우면하지 않고 면학의 열정을 불태워왔던 아이들이, 막중대사(莫重大事)인 수능시험을 앞두고 이런 탈진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번아웃 신드롬이 깊어지면 심한 우울증이 오고, 심하면 자포자기의 극단적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교실 사정이 이렇게 폭풍전야 같다 보니, 담임교사로서의 처신이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우선 아이들의 기를 살리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 던졌다. 나아가 행여 아이들이 자신감을 잃을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교편(敎鞭) 대신, 입에 발린 칭찬으로 성취동기 부여를 위해 애면글면했다. 진학상담 때면 성공한 선배들의 일화를 동일시 기제로 삼아 충분히 합격할 수 있다며, 불안에 떠는 작은 어깨를 다독였다. 학습리듬이 깨어질까 눈살이 찌푸려지는 지각이나 단정치 못한 복장도 못 본 척 하고, 한 켠에서 기침 소리만 들려도 혹시 독감이 아닌가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과 노트가 교실바닥에 나뒹굴고, 책상 위에 물병과 화장지, 심지어 세면도구까지 어질러져 있어도 애써 외면한 채, 격려의 덕담을 건넬 수 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 갑자기 표변(豹變)한 나를 보며, 아이들은 선생님이 자상해졌다고 좋아하며 신이 났다.
그래! 사랑하는 아이들아. 조금만 힘을 내서 꼭 꿈을 이루거라. 선생님은 그 때까지 간과 쓸개까지 다 빼놓고, 오직 너희들을 위해 기도하고 마무리 학습지도에 최선을 다 하마.
<고권일.수필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