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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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강종호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믿음과 신뢰를 잃었을 때 가장 비참해진다.” 연을 이용해 번개와 방전의 원리를 밝혀 피뢰침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스산한 가을 바람마냥 사회 도처에 어수선한 일들이 만연한 이즈음 시사하는 바가 제법 큰 말인 듯하다.

간헐적으로 뻥뻥 터지는 굵직한 사건들의 내막을 면밀히 살펴보면 신뢰를 상실한 데서 비롯된 일들이 적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상호 간에 믿음이 사라진 데서 갈등이 야기되고, 이런 갈등이 뒤엉키다 보면 사안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확대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마치 자연계의 먹이사슬을 방불케 한다.

고도의 산업화로 인한 경제성장의 어두운 그림자라고나 할까. 간혹 서적을 통해 만나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방식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 일면을 예전 한약재 거래 양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구증 구포’한 약재라는 상대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찌고 말리기를 아홉 번씩이나 하였으니, 일반 약재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파는 사람의 정성과 사는 사람의 믿음이 합쳐지니, 약효 또한 당연히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구증 구포’라는 말조차 생소하게 여겨진다. 우리 사회에 불신의 골이 너무 깊어 아예 무감각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일부 악덕 상혼이 파장을 일으키면, 청순하고 고요한 대다수 국민의 마음에는 이내 물보라가 인다. 극단적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속고 속이는 관행이 근절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불우 이웃 돕기 성금마저 착복해 버리는 불신 시대. 도처에 허언(虛言)이 난무하고, 파렴치한 행위가 성행하는 곳에서는 올곧은 민심이 싹트지 않는다. 불과 일백 년을 채우기도 힘든 우리네 인생. 굳이 남의 등을 밟고 올라설 필요가 있을까? 불신의 벽은 빨리 허물어질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억새밭 너머 홍록으로 물들어가는 영산(靈山)이 가을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다. 머잖아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겠지만, 그 심연에는 봄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 것을. 봄바람에 기지개 켜는 새싹의 기운을 받아 혹 ‘신뢰의 시대’가 도래하지는 않을까?
<강종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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