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된 시인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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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국 농업사랑 편집주간/시조시인>

노천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 유리에 빨간 잎 하나 떨어져 있다. 한여름 땡볕과 비바람을 견디며 모체의 양분 축적을 위해 제 할일 다 끝낸 잎이다. 그 어떤 지푸라기 한올까지 세상의 완벽한 균형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했을 때, 오늘 아침 이 홍엽(紅葉)의 몸짓이야말로 사람의 눈과 귀를 멎게 하기에 충분하다.

플라톤은 “독자의 감정을 흥분시키고 이지력을 해쳐 진리의 길을 막는다”며 시(詩)를 부정했고, 결국 ‘시인추방론’을 내세웠다. 만약 오늘 아침 플라톤이 이 옆에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어이, 고 형! 낙엽 한장 가지고 뭘 그리 유심히 보고 있소? 그냥 싹 쓸어 모아 불태워버리면 될 것을 가지고…” 그랬더라면, 나는 플라톤에게 “어이, 미스터 플라톤! 그럴 필요가 뭐 있겠소, 차라리 봄부터 이 가로수 밑둥을 전부 잘라버리면 될 것을”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요즘은 돈이나 건강, 수능성적에 관련 되지 않으면 아무도 쳐다보려하지 않는다. 시집 따위는 아랑곳없이, 재테크나 학과점수를 위한 서적들이 서점 전면 진열대를 장악하고 있는 것만 봐도 돈과 자녀교육문제로 우리가 얼마나 다급해져 있는가를 짐작케 한다.

일반적으로 돈이나 수능성적은 목표일뿐이지 삶의 목적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목표’가 무엇이며 ‘목적’이 무엇인지조차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바로 요때닷!” 기다렸다는 듯, 통치권은 경제대국의 기치를 내세우며 서민들의 허리를 더욱 졸라메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상한 신조어를 탄생시키면서 최저임금의 당근뿌리를 코앞에 걸어놓는다. 광장을 차단하고 심지어는 촛불 든 아녀자의 머리채도 서슴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친다. 결국 이 고삐에 매달린 당나귀들은 그 한 뿌리의 당근을 쫓아 물불 마다않고 여기저기 쫓아다닌다.

삼십년 전 이 땅의 한 논객은 알콜리즘에 빠진 미국 젊은이들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옳고 그름 따위는 도무지 자기와 상관없다는 일본의 젊은이들도 목격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땅에서 잠들 줄 모르는 불의의 항거를 가장 큰 자랑거리로 삼았다.

플라톤이 옹호했던 공리주의, 또는 물질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일까.

시대는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땅엔 제대로 된 비판기능이 없다. 아니, 없는 게 아니라 철저히 봉쇄당한 것이라 해야 맞다. 그 기간이 차츰 길어지면서 결국 왕년 의(儀)의 목마름에 타던 이 땅 젊은이들의 함성은 물론, 그 빛나던 눈동자들도 먹고 사는 현실의 어둠 속으로 하나 둘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요즘 시인들의 첫 번째 화두는 무엇일까. 그냥 ‘술’이라고만 하기엔 필자의 가슴이 너무 쓰리다. 당초 ‘술 권하는 사회’에서 ‘술독에 빠진 사회’라 해야 할 것인가, 이미 몽롱해진 저들의 눈동자엔 세상을 똑바로 응시하려는 의욕도 의지도 없는 것 같다. 시대는 골병들어 그로기상태에 놓여있는데, 시인들은 체념적 알콜리즘에 흐느적이면서 ‘갈대의 순정’만 불러댄다. 그게 물질만능주의 덫에 걸린 시대의 신음이며, 우민정치(愚民政治)를 시도하려는 현 통치권의 현대판 시인 추방론에 추방당한 시인들의 슬픈 초상일지 모른다.

한 생명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실 된 모습을 내보인다. 낙엽 직전의 나뭇잎은 그래서 아름답다. 핑그르르…, 또 다른 홍엽 한 장이 가슴에 다가와 속삭인다. “예나 지금이나 진실과 정의는 외롭다. 그 외로움에 다가가려 부단히 애쓰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 가까이에 있는 자체만으로도 부끄러워할 줄 안다. 시는 죽어도 시인만은 살아남아야 하는 역사의 가르침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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