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어·한글을 서예로 표현하는 것이 평생의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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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곬 현병찬 선생의 붓 잡아 반세기

① 연재를 시작하며
서예가 한곬 현병찬 선생(70)의 ‘붓 잡아 반세기’ 연재를 시작한다. 한곬 선생은 1941년 제주시에서 태어나 제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암 현중화 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지난 2003년까지 44년간 교직에 헌신하며 한글서예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 제주말씨를 서예작품으로 창작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지난 1992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필력을 널리 과시한 한곬 선생은 현재 제주도한글서예사랑모임 이사장을 맡아 후학 지도에 힘쓰며 제주 서예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본지는 한곬 선생의 어린시절의 추억을 비롯 서예 입문, 44년간의 교직생활, 제주서예 발전의 발자취 등을 엮어 일대기를 소개하는 기회를 갖는다. 【편집자 주】

▲제주어 가치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제주어의 가치를 알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제주어와 한글을 표현해 낸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 평생을 업으로 삼고 있는 서예를 하면서 큰 보람으로 느끼고 있다.

 

돌이켜보면 1992년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대상 수상 작품이 한글이었던 게 많은 힘을 보태어 주고 있다.

 

100여 년 전 유림들이 지은 한라산 예찬 시에서 일부를 발췌한 ‘한라산 시’이지만 제주적인 것을 소재로 많이 쓰려 했던 결과였다고 본다.

 

평단에서는 한문서예의 조형미를 한글에 접목해 힘있게 쓴 것이라는 좋은 평가를 내려줬다.

 

그러나 50이라는 지천명의 나이에 큰 짐을 진 듯 무거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영원한 스승, 현중화·박태준 선생
1957년 제주사범학교 재학시절 소암 현중화 선생(1907∼ 1997)의 가르침을 받아 서예에 입문한 지도 벌써 53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소암 선생은 일본에서 귀국 후 행초서를 육조해로 재해석해 한국서예의 이채(異彩)로 자기의 세계를 열었던 스승이었다.

 

소암 선생은 모든 서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그 중에서도 한자 한글을 한필로 아우르는 행초서에 일가를 이뤘던 대가셨다.

 

처음에는 한자서예를 배우다가 2학년 때부터 한글을 가르쳐 주셨는데 졸업을 하고나서는 한글서예를 사사할 만한 스승이 없어 뜻대로 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거의 10년을 방황도 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부터 학생 지도에 매진하면서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어디에서 그런 열정이 솟아났을까.

 

제주북초등학교에서 350명의 어린이들을 혼자 지도해 전국학생서예실기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일이 그 계기였다.

 

가르친다는 것은 또 다른 배움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던 중 서울 예술의 전당 개관 기념 회원전에 출품을 했는데 전시장에 가서 다른 작품들과 내 작품을 비교해 보았을때, 아 그때 나의 못난 작품을 보는 좌절감은 무엇에 비할까.

 

뼛속 깊이 각성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쓰고 또 쓰고 다시 쓰기를 되풀이했다.

 

이후 1980년에는 해정 박태준 선생(1926∼2001)에게서 서예를 계속 배웠다.

 

해정 선생은 평소 후학들에게 ‘바른 마음이 손재주의 주인’임을 몸소 실천하신 서예가로 유명하신 분이다.

 

정연회는 해정 선생의 지도를 받아온 제자들의 모임으로 신산공원에 묵적비를 세우는가 하면 지난 2002년부터 해마다 스승을 기리는 추모서전을 열고 있다. 몇 해 전에는 타계 4돌을 맞아 전국에 흩어져 있던 작품을 모아 ‘해정 박태준 서집’을 펴내 스승의 생애와 서예술을 기렸다.

▲먹글이 있는 집
지난 2006년 6월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고(故) 신철주 북제주군수의 흉상이 세워졌다.

 

문화·예술 발전에 힘써온 신 군수의 생전 치적을 기리기 위해 입주 예술인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추진했었다.

 

당시 내가 흉상건립추진책임위원을 맡아 일을 진행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도 흉상 앞을 지날 때면 고인의 남다른 열정에 발길이 잠시 멈춰진다.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은 신 전 군수가 문화·예술 시책을 적극적으로 펼친 결과물로 지난 2001년 사업을 시작했다. 기반시설을 토대로 자연환경을 그대로 살리면서 800석 규모의 야외무대, 제주돌을 활용한 경계 돌담, 송이를 깐 안길 등이 건물들과 조화를 이뤘다.

 

내가 여기에 ‘먹글이 있는 집’을 연 때가 2003년 7월 17일이다.

 

1층은 갤러리 공간과 제자들의 작업공간이다.

 

2층에는 나의 거처가 마련됐다.

 

미치지(狂) 않으면 미칠(及)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처음 입주할 때 만해도 이 산속에 전 재산을 투자해 놓고 남들이 다 하는 골프 같은 취미는 아예 모르고 독수공방을 하며 지낸 세월 어언 7년이다.

 

가족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래도 나는 행복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정말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한글 서예 작업의 과제
2008년 10월 24일. 한국을 대표해 제주도한글서예사랑모임이 훈민정음 반포 562돌을 기념해 중국 절강월수국제한글문화큰잔치에 초대됐다.

 

제주풍광한글서예전으로 중국 대학은 물론 한글을 배우는 전 중국 대학생들과 교류와 우의를 다지고 한글서예를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됐었다.

 

한국국립국어원 이상규 원장과 난정서법예술학원 왕옥초 사무처장이 축사를 했고 나의 한글 휘호에 박수를 보냈던 참석자들이 인상에 남는 행사였다.

 

이처럼 외국에서는 한글서예에 대한 시선이 매우 고무적인 데 반해 국내에서는 경시풍조가 많아 그 안타까움이 늘 마음을 저리게 한다.

 

제주에서 70평생을 사는 동안 바다는 늘 나에게 많은 희망과 과제를 던져줬다.

 

수평선 너머로 찬란한 도원이 있어 평소의 꿈이 환하게 펼쳐지리라는 희망과 함께 용틀임하는 파도는 생동감 넘치는 글씨를 더 힘차게 쓰라는 숙제를 안겨줬다.

 

파도 획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는 것이 나의 서예의 출발점이 아닌가 지금도 생각해 본다. <정리=김홍철 기자 >
hckim@jejunews.com




#한곬 현병찬 선생은
▲약력
△1960년 제주사범학교 졸업
△1960년부터 2003년까지(44년간) 초등학교
교사, 교감, 장학사, 교장 봉직
△1957년 소암 현중화 선생 사사
△1980년 해정 박태준 선생 사사
△2003년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서예전시관
‘먹글이 있는 집’운영
▲수상
△1992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원곡서예상 수상
△훈민정음반포 562돌 한글사랑실천 표창
△황조근정훈장
▲경력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심사 및
심사위원장 역임
△대한민국 공무원미술대전, 세종한글서예대전,
경남미술대전, 대한민국한글서예대전 등
심사위원장 및 심사위원 역임
△한국미술협회 한글서예분과 위원장(현재)
△한국서학회 이사(현재)
△영주연묵회 이사장(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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