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達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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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수필가)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1900년대를 풍미했던 가객(歌客), 파인(巴人) 김 동환(金 東煥)의 ‘북청 물장수’ 들머리 부분이다. 여명의 이마에 닿는 섬뜩함으로 혼곤한 잠의 질곡을 타파하고, 청신한 새벽을 항아리에 채우는 물장수의 조심스런 기척. 물에 젖은 사내가 더운 김으로 피워 올렸을 노동의 새벽은, 유년의 파인에게 새로운 하루를 알리는 ‘모닝 콜’ 같은 것이었으리라. 잠의 잔해가 앙금으로 남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멀어져 가는 물장수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모으는 파인의 천진한 눈동자가, 아직까지도 눈에 밟히는 애송시(愛誦詩)이다.

파인에게 새벽을 여는 북청 물장수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달마도(達磨圖))가 있다.
누가 언제 그린 작품인지, 누구에게서 그림을 받았는지도 기억에 가물거리지만, 언제부터인가 거실 벽에 정좌한 채 나를 응시하는 사내. 그 사내의 초상을 보면서 항상 미망(迷妄)에서 깨어나, 삶의 새벽을 연다.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는 각고(刻苦)의 정진. 고독과 정밀(靜謐)로 점철되었을 시간의 황무지를 구도(求道)의 쟁기 하나로 일구어, 마침내 선종(禪宗)이라는 구원을 찾아낸 초인(超人). 그 치열한 영혼 앞에서 나타(懶惰))와 퇴영(退嬰)은 가당찮다.
명징한 깨달음을 증거하는 번쩍이는 이마, 누에가 꿈틀거리는 듯한 눈썹, 장판교의 장비처럼 흩날리는 수염. 그러나 역시 달마도의 압권은, 부릅뜬 두 눈이다. 이제는 신화, 또는 전설이 되어 버린 그의 형형한 눈빛. 꼿꼿이 가부좌를 튼 채 견뎌야 했던 9년이란 시간의 무게. 무엇보다 쏟아지는 잠을 참아내는 일의 지난(至難)함이, 타는듯한 그 눈동자 속에 오롯이 남아있다.

9년 동안 딱 한 번, 그 눈이 감겼던 적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눈꺼풀의 하중에 기진하여, 잠깐 졸았던 날이었다. 부처와 자신에게 했던 면벽의 서언(誓言)이 나락으로 떨어지던 그 날. 그는 수행의 백척간두에서, 건곤일척의 한 발을 내던졌다. 치열한 정진의 걸림돌인 수마(垂魔)를 쫒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내 버린 것이다. 그 후 감을래야 감을 수조차 없는 깨어있는 눈동자로, 시대를 관통하며 진리를 응시하는 달마. 그 앞에서 부초(浮草)같이 허망한 내 삶이, 어찌 전율하지 않겠는가. 오금이 저려오지 않겠는가.

달마도는, 준엄한 정각(正覺)의 가르침으로 언제나 내 심전에 깃발처럼 펄럭인다. 그리하여 세파에 흔들리고 풍진에 시야가 흐릴 때마다, 죽비의 편달(鞭撻)로 나를 바로 세운다. 극구광음(隙駒光陰) 속에 또 새해를 맞았다. 내 인생에 다시 못 볼 신묘년의 지평을 향해, 달마와 함께 부릅뜬 눈으로, 올곧은 걸음을 걸어가야 하겠다. <고권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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