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수 먹고 갈비 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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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 세종대학교 국문과 교수/작가>

새해 첫날의 일이었다. 얼어붙은 길에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뒷바퀴가 헛돌며 비실비실 미끄러져 내려가던 차는 드디어 길 옆 개골창에 처박힐 듯 아슬아슬하게 멈춘다. 미사 시간은 십여 분 앞으로 다가오는데 성당을 눈앞에 두고 차가 움직이지를 못하니 이를 어쩔 것인가. 새해 첫 미사를 천주교 성지에서 드리기 위해 충북 진천의 깊은 산 속까지 찾아왔는데 자동차가 새해 첫날부터 너 죽고 나 죽자가 아닌가.

  성지로 전화를 했다. 어떻게든 미사라도 드릴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에 수녀는 성지관리인의 트럭을 보낼 테니 타고오라고 했다. 공사장비가 가득한 트럭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이고 겨우 성지에 도착했다. 서둘러 성당으로 올라가자니 가득하게 눈이 쌓인 주차장 한 옆에 걸려 있는 현수막이 바라보였다. ‘배티(梨峙)성지가 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것을 축하한다’는 신자들의 현수막이었다.

  지자체가 지역의 문화재를 발굴하고 개발하는데 힘을 기울여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효과를 찾자면 멀리 갈 것도 없다. 바로 이곳 배티성지의 김웅렬 신부가 한 표본이 될 수 있다. 김 신부가 감곡성당을 맡아 성모님을 위한 성지로 가꾸어 가면서 전국에서 감곡 매괴성당(매괴는 장미꽃이라는 뜻)을 찾는 천주교 순례자가 하루 4천명을 넘는 날도 있었다. 한 성당을 찾아 조그만 지방 도시에 하루 4천명이 몰렸다면 이건 지역경제의 활성화라는 수치로 이야기할 일이 아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수익만도 얼마였겠는가. 그래서 김 신부가 감곡을 떠나 이곳 배티성지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 감곡의 식당주인과 택시기사가 ‘신부님이 가시면 우리는 어쩌느냐’고 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문화의 힘이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여주는 좋은 예의 하나다.

  지역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새롭게 조명하고 다듬어서 기리는 정책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도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고유문화와 제3세계의 지역문화에 눈을 돌리는데서 시작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그 문화재의, 그 가치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사려 깊은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문화재를 개발한다면서 어디나 똑같은 형태의 쉼터, 벤치와 계단, 연못과 오솔길이 조경업자에 의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후 천주교 성지조차 곳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화려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 변신이 훼손에 가깝다. 이름도 없이 스러져가야 했던 무명순교자들을 기리며 담백했던 옛 사적지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원처럼 쉼터가 되어 가고 있다.

  배티가 이제 또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것이다. 이곳은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1년이면 7천리를 걸어서 전국을 돌며 12년간 사목활동을 했던 거점 마을 교우촌이었다. 이곳 산골짜기에는 지금도 무명 순교자의 줄무덤이 이름 모를 들꽃처럼 피어 있다.

  이런 종교적 의미만이 아니다. 이곳은 최초로 천주교 조선교구의 신학교가 설립되었던 곳이다. 두 칸짜리 초가집이 신학교 교사로 자리 잡고, 신학은 물론 라틴어와 프랑스어라는 최초의 서양학문과 언어를 익히는 교육이 이루어졌고 그렇게 해서 1854년 3월에는 세 명의 신학생이 말레이시아의 페낭신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토록 역사적 가치가 깊은 곳이다.

  한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적 눈뜸이라는 배티성지의 의미를 널리 알리고 내일의 지표로 삼는 것은 더할 수 없이 가치 있는 일이다. 일차적으로는 사적지 담당자의 양식의 문제이겠으나, 이 가치 있는 일이 그 가치의 완성도를 더욱 높이는 쪽으로 이루어지도록 충청북도 담당자들이 마음을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미사를 끝내고 나오며 바라본 배티성지의 산기슭은 눈이 덮인 채 얼어붙어서 가슴이 시리도록 희고 아름다웠다. 불쑥 버려두고 온 승용차가 떠올랐다. 이 깊은 산골짜기에서 개골창에 처박힐 듯 기울어져 있는 내 차는 어찌할 것인가. 지자체의 문화정책이 문제가 아니다. 우선 내 코가 삭자로구나. 내가 지금 새해 첫날부터 냉수 먹고 갈비 트림 하는 꼴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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