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큰 얼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큰 얼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유배중에도 학문.서예 집념 붓 1000자루 몽당붓 만들어
▲ 제주도는 2007년 10월 제주추사적거지가 제주도 기념물에서 국가지정 사적으로 승격된데 따라 지난해 5월 제주추사관을 신축했다. 제주추사관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유배 시절 그린 걸작 ‘세한도(국보 180호)’의 건물을 본떠 형식에 얽매지 않되 그의 정신을 투영하고 장식요소와 기교는 절제해 지어졌다. 지하 2층, 지상 1층 연면적 1192㎡의 목조 건축물에 추사기념홀을 비롯해 전시실, 교육실, 수장고 등이 설치됐다. 사진은 추사관 전시실 내부 모습.

▲추사의 이야기를 시작하며=“세상에는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고 줄곧 말해지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언젠가 학생들에게 “추사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이며 당대 최고의 석학인 그를 당연히 알거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아는 학생이 얼마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산 정약용은 모르는 학생이 없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를 다룬 ‘이산’이라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거기에 탤런트 송창의가 다산 역을 맡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필자가 ‘제주유배문화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사업’을 수행하면서 어쩌면 가장 시급한 것이 ‘추사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니까 제주유배길의 하나인 ‘추사유배길’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추사를 모르는데 어찌 찾아올 것인가 하는 염려가 크다. 최근에 새롭게 개관한 ‘추사관’도 찾는 사람이 드문 것이 사실이다. 이런 고민 때문에 필자는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추사를 어떻게 ‘모르는 사람들도 알게’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제주유배문화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사업’의 1차년도가 종료되는 오는 4월에 가시화 되겠지만 ‘추사유배길’은 다양한 방법으로 추사의 이야기로 채워질 것이다. 바라건대 단지 건강만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추사유배길’을 걷기바라며 그 이야기를 토대로 드라마도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본 연재를 통해 독자들을 먼저 추사의 길로 안내해보고자 한다.

 

▲왜 추사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가?=‘추사유배길’은 ‘추사가 걷던 길’이자 ‘추사에게 길을 묻는 길’이다. 추사는 이 길 위에서 제자들을 기르고, 추사체를 완성했으며 또한 시를 쓰고, 무수한 편지를 보냈는가 하면 차와 귤, 여러 가지 꽃들을 사랑하면서 귀양살이 외로움을 달랬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걷던 ‘추사유배길’을 걸으며 한 인간의 고독과 집념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추사유배길에서 우리는 길을 물어보아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추사는 대정향교의 기숙사인 동재에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 글씨를 써준 적이 있다. 공부나 인생이나 매한가지 의문을 던지는데서 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했던 추사의 뜻이 잘 드러난 글로 현재 추사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공부도 그렇지만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하는 인생의 의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해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추사는 그 대답을 몸소 보여주고, 들려준다는 점에서 훌륭한 ‘큰 바위 얼굴’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추사유배길을 걸으며 내 인생의 길을, 내 삶의 길을 추사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때 그는 기꺼이 대답할 것이다. “내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으니(七十年磨穿十硏禿盡千毫) 당신도 그렇게 노력하시오”라고.

 

▲그렇다면 추사라는 사람은 누구인가?=우선 그는 호가 100여 개나 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백호당(百號堂)이란 호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우리에게 낯익은 것이 추사와 완당이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3개나 된다고도 하니 참으로 별일이다. 왜 이리 호가 많은 것일까? 모르긴 해도 남다름을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의 남다름은 유별나다. 24개월이나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는 출생부터가 그렇다. 그가 태어나던 날 동네 우물이 줄어들고 팔봉산 수목이 모두 시들었다는 얘기도 마찬가지다.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이 39살에 요절을 하자 큰형의 셋째 아들 김이주가 제사를 모신다. 김이주의 큰아들 김노영 또한 아들이 없자 넷째 김노경의 아들인 추사가 4살에 김노영 앞으로 입양된다. 이로써 추사는 로열패밀리의 일원으로 한양에서 남다른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입춘점(立春帖) 때문에 6살 때 실학자 박제가와 7살 때는 재상 체제공을 만난 일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 역시 추사의 남다름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에피소드들이다.

 

큰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연이은 사망으로 12세에 추사는 가문의 주인이 된다. 이 때문에 집안에서는 결혼을 서두르니 그의 나이 15세였다. 다음해에는 어머니가, 혼례를 올린 지 5년 만에는 백년해로의 약속을 깨고 아내마저 세상을 버린다. 이어 박제가도 눈을 감지만 다행히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만은 건재했다.

 

시인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고 했다. 당시 추사를 키운 것은 8할이 죽음이었다. 죽음의 경험이 가져다준 공포감, 정체를 알 수 없는 실존적 두려움, 이 모든 것을 그는 글과 글씨 공부를 통해 이겨 나갔다. 그러다가 23세에 예안이씨와 재혼을 한다.

 

다음해인 순조 9년(1809) 김노경이 중국에 보내지는 사절인 동지부사가 된다. 이때 추사는 외교관의 아우나 자식에게 부여되는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자격으로 아버지를 따라간다. 북경 기행이야말로 추사가 천하의 인재로 커나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다.

 

추사는 북경에서 여러 훌륭한 학자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 옹방강을 만날 수 있었다. 옹방강은 기백이 넘치는 추사의 남다름을 한눈에 알아보고 “경전과 예술 문장이 조선에서 가장 뛰어나다(經術文章 海東第一)”고 칭찬하였다. 추사는 이렇게 청나라의 여러 학자, 예술가들과 교분을 나눔으로써 이른바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

 

추사는 청대의 사상을 수입해 조선 문화의 활로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추사의 학문이나 글씨의 성취는 높이 사더라도 중국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청조 문화의 수입에만 골몰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




<추사유배길 사업은?>

2010년 지식경제부 광역경제권연계협력사업인 ‘제주유배문화의 녹색관광자원화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사업’의 목적은 독특한 제주유배문화를 기반으로 차별화된 신개념 녹색관광융합콘텐츠를 만들어 제주관광의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하려는 것이다.

 

▲ 추사유배길로 개발될 전경.

이를 위해 2013년까지 3년간 총 25억원을 투자하여 ▲제주유배길 개발 ▲제주유배인 중심의 매력적인 스토리 개발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등의 디지털 콘텐츠 개발 ▲제주유배문화 내비게이터 양성교육 ▲주민공동체 사업 등을 추진함으로써 물질적 콘텐츠, 인적 콘텐츠, 정신적 콘텐츠 등이 어우러진 제주유배문화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개발한다.

 

이들 3종류의 콘텐츠들은 제주유배길을 걸을 때 역사와 문화와 스토리를 체험할 수 있도록 모두 연동된다.

 

따라서 유배길은 단순히 발로만 걷는 길이라기보다는 역사와 문화와 스토리를 체험하는 머리로 걷는 길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 도보체험상품이 될 것이다. 1차년도에는 대정고을을 중심으로 추사유배길 3개 구역이 조성된다. 그리고 커뮤니티 비즈니스 센터를 구축하여 이 사업을 통해 지역주민들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나아가 소득이 창출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도 만들어 질 것이다. 따라서 이 사업을 통해 새로운 녹색관광융합상품을 출시하여 제주를 찾는 관광객에게 새로운 볼거리, 새로운 즐길거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양진건 제주대 교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